씨앗이 나무가 될 수 없는 세계
가끔 이유 없이 멈추고 싶어진다.
지하철 통로에서, 무언가를 정리하는 중에, 잠들기 직전 천장을 보며.
이 순간이 그대로였으면, 지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질문.
시간이 멈춘다면,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처음엔 아름다운 상상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오후가 영원히 멈추고, 사랑하는 얼굴이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세계.
하지만 오래 붙들수록 그것은 소원이 아니라 의문이 된다.
움직임이 사라진 자리에도 ‘나’가 남을 수 있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강이 강인 까닭은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흐름이 멈추면 웅덩이나 늪이 된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어지는 과정이다.
세포도, 생각도, 두려움도 사랑도 매일 조금씩 다르다.
그럼에도 내가 나로 느껴지는 것은 기억이 순간들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억이 생기지 않는 세계에서, 나는 어디까지 나일 수 있을까.
시간은 변화의 척도다(아리스토텔레스).
변동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
멈춘 세계에서는 씨앗이 싹트지 않고, 상처가 아물지 않으며,
나는 지금의 나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디킨스의 헤비샴 부인이 그랬듯, 시계를 멈추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먼지 속에 갇힌다.
그건 슬픔보다 정지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
생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모습.
불교는 말한다.
무아(無我).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
고정된 ‘나’라는 관념이 부정되는 것이다.
선사의 물음처럼
태어나기 전 너의 본래 얼굴은 무엇이냐.
그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얼굴을 거쳐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하나의 얼굴에 머무르지 않기에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새와 박제된 새는 멀리서 보면 닮았지만,
하나는 날고 하나는 진열된다.
시간이 멈추면 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다.
그것은 영원이 아니라 정적이다.
의식마저 멈추지 않는다면?
그러나 생각하는 것 자체가 움직임이다.
한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이어지는 미세한 전이.
의식이 있다면 시간은 이미 존재한다.
완전한 정지와 살아 있는 마음은 공존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이렇게 닿는다.
나는 시간 속에 놓인 존재가 아니라, 달라짐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다.
강이 흐름으로 강이듯, 나는 변화의 연속 위에 서 있다.
그 흐름이 멈추면 나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 결론은 슬프지 않다. 오히려 안도에 가깝다.
어제와 오늘의 내가 어긋나고, 한때의 확신을 지금은 의심한다는 사실.
그 흔들림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잃음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가능성을 연다.
지금의 슬픔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지금 상상 못 하는 무언가를 내가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여지는 흐름 위에서만 열린다.
우리가 시간을 멈추고 싶어 하는 순간,
그것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의 고백이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두려움을 안다.
달라질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강은 흘러야 강이다.
나는 변해야 나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어제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내가 아직 살아 있고, 여전히 나라는 증거다.
시간이 멈춘다면 나는 나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흐른다.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