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그 길고 섬세한 손이다.
발레는 발가락을 혹사시켜 추는 춤이라던데, 이 클래식한 춤이 한 명의 발레리나를 조각하는 기다란 세월 동안 그 정수인 고아함은 점점 더 손끝으로 응축되어 가는 걸까? 어떤 메커니즘이 발레리나의 손끝을 빚는지, 무용하는 여자의 손은 왜 고와지는지, 아니면 그런 손 매무새를 갖고 태어난 여자는 춤을 추게끔 몫을 받은 것인지.
"오랜만이에요.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꾸밈없는 반가움이 묻어난다. 춤은 순수를 위장할 수 없다고 믿어왔다. 무릇 춤추는 사람이란 미소를 타인의 심장에 곧장 내리꽂는 특권을 지녔으니 지상에서도 부러운 족속이다.
“재즈 배우러 왔어요, 춘春 선생님한테요.”
“그럼, 발레도 배우세요.”
그녀는 깃털처럼 사라진다. 바닥이라는 이름의 모든 평면을 아마도 그녀는 발바닥을 대지 않은 채 미끄러질 것이다. 바닥은 상징일 뿐 그녀의 몸체에 중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라면, 자기 집 냉장고 문까지도 몇 차례의 피루에트로 도달하겠지? 그녀가 사라진 공기 속엔 그녀가 뿌린 향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한다.
그림자라곤 없는 여인 같으니! 그러나 일 년 전쯤 그녀는 늘 망토 그림자 같은 남자를 붙들고 춤을 추었더랬지.
재즈 댄스 학원, 그녀가 사라져 간 복도 끝, 망토 남자, 그가 서 있다. 한 손엔, 그의 영구 액세서리 같던 가면이 들려져 있다. 그에게 다가가려 복도를 내딛는 순간, 이 신기루는 증발할 것이다. 손을 뻗으려다 만다.
“따스해 보여요.”
불쑥, 그가 말을 건넨다. 막 저녁을 먹고 난 밀롱게로스들(탱고를 추는 남녀들을 지칭)이 바에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이다. 일찌감치 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신발을 갈아 신은 다음 춤추기 위한 워밍업 음료 같은 핫초코를 앞에 둔 참이다. 쿠션감이 조금 있는 옆의 소파 자리엔, 수줍은 웅크림 따위와는 거리가 먼 남미 여인 같은 블루 크리스털이 앉아, 양다리를 위로 뻗어 상체와 밀착시키는 고난도의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댄서들이나 할 만한 동작이니 그녀는 프로페셔널일 것이다. 그녀도 그의 지인 중 하나다. 아마도 사심 없는 지인. 내가 핫초코 위에 둥둥 뜬 마시멜로 조각들을 목 넘기는 데 아무런 걸림이 되지 않을.
따스해 보여요, 그가 던진 이 한 마디가 내 앞의 핫초코를 겨냥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분명치 않은 동작으로 그는, 내가 걸쳐 입은 니트 스웨터를 가리켰으니까. 살짝 푸른 기氣 도는 비둘기 빛 짧은 카디건. 살짝 푸른 기가 도는 비둘기 빛임을 한 번 더 강조해 둔다.
따뜻하다, 그에게서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다. 그는 내가 얼기설기 올 성긴 니트를 걸치고 나타날 때마다 그렇게 말했었다. 오늘처럼 회색이라던가 푸른 기운이 돈다던가 하는 옷을 입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게 무슨 색이건, 그에게, 나라는 섬유가 가진 온도는 그러한가 보다.
그와는 늦가을에 만났다. 그리하여 겨우내 같은 불을 쬐다가 모진 춘풍을 만나 앓고는 초봄을 맞는 우리들이다. 한랭한 계절, 그가 내게 구한 것은 온기,라고 회상한다. 제법 따스한 보풀이 달린 보드라운 실로 짜인 나는, 그라는 한 마리 추운 새를 빌어 잠시 한때 온기의 둥지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멋대로 삼아버린 나란 둥지가 품은 내밀한 욕망은 한편으론 억센 그물망의 모양새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