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후의 밀롱가. 남자 친구가 동행했다. 그는 저기 앉아 있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안다, 그가 나를 보았으나 못 본 체한다는 것을. 그는 더 이상 춤을 청하지 않는다. 더 이상은 나에게로 실수로라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이제, 기댈 겨울을 잃은 것뿐이다.
단 한 번, 초여름의 열기가 감돌던 날, 오나다의 계단을 내려가던 참이었다. 마침 계단을 올라와 지상으로 빠져나가려는 그와 마주친다. 어쩐 일인지, 그는 말없이 그러나 초저녁에 막 점등된 가로등 같은 얼굴을 하고는, 양손을 내밀더니 내 두 손을 얼싸 잡았다. 마치, ‘우린 여기 말고, 어딘가 같은 세계에서 만났었지요. 그것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아요.’라고 하는 듯이. 그리고 사라졌다. 다시는 지하에 오지 않았다. 우리에게 어떤 순간이 있었다는 기억을 간직할게요, 라는 작별인사였을까?
내 발걸음은 절로 뜸해졌다. 우리의 아리아가 흐르지 않는 이상 더 내어줄 걸음이 없었으니.
그러나 그 가을, 건너뛰지 못할 이벤트가 있었다. 탱고 페스티벌에 파블로 베론이 초대된 것이었다. 그가 그랜드 밀롱가에서 오픈 공연을 할 참이었다. 나는 모든 페스티벌에 참여하진 않지만 파블로 베론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영화 탱고 레슨 이후 우리 모두의 이데알(IDEAL.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밀롱가 이름)이었다.
그 저녁을 앞두고 해거미가 내리기 직전 무렵 나는 인사동을 걷고 있었다. 은행잎들이 내 발걸음을 몰아갔다. 그것들은 낙하하는 기억들, 못다 나눈 키스들이었다. 모든 나날들에 점지된 거의 모든 인연들은 불발된다. 불발되었으니 아득해질 수 있다. 만나지 못하는 거리만큼 영원히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서 있는다. 정한(情恨)의 소도로 가는 이 노란 우표들은 인력의 법칙에 축복받아 낙하했다가 다시 비행을 시작했다. 그 작은 등마다, 껴안지 못하는 순간들을 날개처럼 얹고.
이때 그가 나와 같은 거리에 있는 우연은 아마 마지막 한 번 만이었을 거다. 예고라곤 없이. 미처 떠나지 못한 유령처럼 그가 다가왔다.
“오늘 저녁에 파블로 베론이 공연한다던데, 그랜드 밀롱가 가실 거죠? 재미날 거 같은데.”
“그럼요. 그럼 거기서 또 뵈어요.”
또 보리라. 그러나 더는 같이 추지는 않으리라. 집시의 옷이란, 열매를 나무를 가지를 떠난 이들만 입는 노란 옷이지. 도토리만 한 열매라도 부둥켜안는 순간 바람의 무게와 속도는 품을 떠나고 만다.
그 날 저녁, 그랜드 밀롱가. 여러 개의 기둥이 있는 커다란 홀. 그와 나는 대체로 대각선에 섰다. 이날 오프닝 공연에서 파블로 베론은 지구 중심에서 뽑아낸 에너지를 하늘 정중앙으로 쏘아 올리는 춤을 추었다. 그는 티베트를 여행하고 나서부터 작은 불상을 늘 지니고 다닌다고 한다. 탱고는 노스탤지어. 저주받은 인간이 잃어버린 신을 향해 뻗는. 베론의 춤엔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사원이 보였다.
원의 지름 저편에 선 그. 우리는 영원히 가까워지는 거리에 섰다. 내 파괴를 무릅쓰고 나 자신을 잊을 만큼 던져야 구할까 말까 한 어둠 속 유령이 저기 있다. 그를 찾으려면 내가 그만 혼들의 나라로 떠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상에 구부려 박아 놓은 못에 걸어놓은 연줄이 흔들렸다. 내 사지가 파닥파닥 펄럭였다. 연줄은 바람에게로 존재를 떠미는 척, 실은 도로 한 개의 조그만 못에 걸려 전전긍긍했다.
그는 선 자리에서 몸을 벗어놓고 계속 도망쳤다. 그를 쫒아 지하로 내려갔다. 플랫폼을 서성이다, 막 떠나려는 지하철로 뛰어들었다. 칸에는 유령들이 어지간히 방만히 흩어져 있었다. 얼핏 모두 사람 행색이었으나 그중 누가 혼령인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인 자들은 다들 잠들어 있었고 유령들만이 깨어 있었다. 그 유령 중 우두머리가 걸어왔다. 자기가 피던 담배를 내게 물리려고 애를 쓰면서. 끝내 한 모금 빨고야 말았다. 맛이 썼고 목구멍이 타는 듯했다.
사람들은 미혼(迷魂)에 취한 듯 잠들었다. 아무도 부스스 일어나 내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하철은 모든 정거장에 빠짐없이 정차했다. 번번이 열렸으나 더 이상 타는 사람은 없었다. 바깥은 유령이 점령한 도시였다. 암흑이었다.
문은 계속 열렸다 닫혔다. 미칠 것 같았다. 목구멍이 타 바스러져 갔다. 모든 플랫폼마다 그가 있었다. 나는 내가 문 담배를 그에게 건네려고 애썼지만 지하철 문은 곧 닫히고 다시 또 출발하곤 했다.
열세 번째 역쯤에야 겨우, 나는 아예 확 내려 버렸다. 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무표정에 아스라한 안타까움만을 담고 서 있었다. 아름드리처럼 우뚝한 그를 안고 플랫폼을 천천히 돌았다. 플랫폼 가득 포에마 Poema(Francisco Canaro의 탱고 곡)가 흘렀다. 그는 언젠가 수줍게 시도하던 히로도 사카다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양발만 교대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마치 한 번도 춤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사람처럼.
“왜, 타지 않았어요? 탔다면 어디에라도 이르지 않았을까요? 당신이 탔더라면...... 지하철 역과 역, 칸과 칸 사이에서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눴을 텐데......”
몇 마디 말들은 눈물과 섞여 버렸다. 고개를 들어 그를 높이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있을 자리엔 해골이 달려 있었다. 양발만 까닥까닥, 뼈들이 달그락거렸다.
수면 약을 잊고 든 잠은 그렇게 설었다.
나는 아주 드물게 밀롱가에 갔다. 로돌프 땅게로들 몇몇은 여전히 그들의 성스런 행진을 계속했으나, 그를 마주치지는 못했다. 언젠가 그와 지젤이 사귄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풍문 아니면 사실일 터였다. 또 시간이 더 흘러서는 누군가로부터, 그가 이혼했던 부인과 재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풍문 아닌 사실일 거였다, 나는 다시금 히드 클리프와 콰지모도에 대한 그의 글들이 그리워져 게시판을 찾았으나 그의 글들은 그의 종적과 더불어 자취가 사라져 있었다.
그가 다시 탈옥을 꿈꿀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지하 명부의 마룻바닥을 스쳤던 그의 발자국들을, 역시나 다시 수많은 다른 구두들이 밟고 지워버렸다고는 말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