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다 한 명씩 입장하는 무도회처럼 꽃들이 차례로 폈다. 봄이 뚜렷했다. 이제 훈풍은 아무 데나 흘렀으나, 우리가 서로를 찾기는 더 어려워졌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더 이상 서로를 담을 핑계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예외적으로 그가 내 생일을 챙겨주기로 했다. 저녁에 홍대 앞 커피빈 앞에서 만나 어스름 녘을 걸어갔다. 놀이터로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보헤미안풍의 옷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는 아쉬움을 삼키듯 내뱉었다, “저런 거 입고 싶지만 그렇질 못해요.”
귀에 닿는 순간 아쉽고 맥 빠지는 소리.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이들까지는 아니더라도 개성 있는 괴짜들도 널린 이 세상엔 그가 교수나 학자라고 해서 입지 못할 옷이 딱히 있을 리 없건만. 떠나고 싶으나 떠나지 못해요, 와 동의의 문장으로 들린다. 그가 저런 옷을 입고 밀롱가에 나타난다면 그를 따라 나야말로...... 허벅지에 꽃을 달고 입장할 것이다. 가터벨트가 달린 망사 스타킹을 신고 한쪽으로 말아 올려진 드레스 끝 허벅지 높은 지점에 커다란 꽃을 매달 것이다. 땅게라가 그런 차림으로 입장하면 아르헨티나의 땅게로들은 그녀를 극진히 모셔 춤을 청한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 수많은 가면을 자유자재로 만들지만 입고 싶은 옷 한 벌을 사지 못한다. 옷도 각각의 감옥이다.
그 히피풍의 옷을 기왕이면 두 개 사서 당장에 갈아입고 데이트를 했으면 좋았겠다. 이 생각에 너무 골몰하다가, 그가 날 이끌어 지나친 거리들, 골목들, 신호등들이 내 앞에서 모조리 지워져 있다. 순간 어떤 카페로 또 순간 이동하여 있다. 어느새 내 앞엔 홍차와 조각 케이크가 놓여있다. 나는 이 순간을 한 모금 한 모금 넘겨야 할 것이다. 초 대신 성냥을 꽂고 그가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다.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지젤이 저 생일방 해야 한다고 했는데......”
멈칫, 그가 얼굴을 굳혔다.
“아, 그 생일방이란 말, 난 무서워요. 왜, 그, 돌림 방이란 말이 생각나서요.”
“네?”
“돌림 방, 그러니까 윤간 같은 거 말이에요.”
“저런, 낙서가 있네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내 시선이 가 닿은 흑판에 그림이 가득했다.
“저런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도 있어요. 미국에. 누가 지우개로 싹 지워버리면 걸작 하나가 없어지는 셈이죠.”
“그러네요.”
걸작의 소실 따위! 그가 나만을 위한 조각 케이크에 불을 지펴주는, 적어도 지금 우리는 같은 새장 안에 있으니.
“나갈까요?”
아늑한 카페였지만 계속 머무르기엔 밖이 더 매혹적이었다. 훈풍이 걸음마다 따라다니는 저녁이었으니까. 다시 어디로 간들, 꽃이 흐르는 공기를 기어코 다시 한번 묻혀야 마음이 달래질 것이다.
또다시, 꽃 향이 진동하는 공기 속을 순간 이동했다. 어느 건물 4층 창가 자리.
“아는 사진작가가 하는 곳이에요.”
테이블 위 촛불이 초저녁의 춤을 춘다. 나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파비안 님과 춤추면, 아빠랑 춤추는 것 같아요.”
“...... 기뻐할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해할 만도 했다. 잘못 전달될만한 칭찬. 하지만 세 곱으로 문장을 늘려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 나를 가장 많이 안아주었을 때의 아빠. 연인처럼 다정했던 내 7살의 아빠. 손수 하얀 스타킹을 신겨 내 손을 잡고 다니던 아빠, 날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리던 아빠. 여자아이에게 최고의 남자. 설명이 변명이 되느니 침묵 속 칩거를 택한다.
“나는 정교한 것들을 사랑하죠. 미술을 하는 것도 그런 거예요. 나를 겹겹이 둘러싼 것들을 하나씩 만나 차례로 벗어가는. 하나를 벗고 나면 또 하나가 올라와 마주치고 또 벗고 이렇게...... 지난번 전시회 때 젤 맘에 드는 작품 얘기했죠?”
추론할 겨를조차 주지 않을 만큼 명료하였었다, 그 작품은. 욕망의 바닥을 우회 없이 개운하게 펼쳐낸 수작秀作이었다. 그러나 그, 그리고 나, 이 배회자들은 결코 호수 한가운데로 걸어가지 못하리라. 반지름이라는 거리도 누군가들에게는 가장 먼 거리가 된다. 우리 같은 이들에겐 그저 수면이 결빙되길 기다려 그 위에서 부둥켜안은 채 백만 스물두 번째 히로를 돎이 그저 최선. 우리, 가라앉길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우리, 저주받은 족속들에게 봄이란 없다. 발버둥을 들키지 않으려 구두를 벗어 들고 호숫가를 서둘러 떠나는 겁쟁이들.
“나갈까요? 밀롱가에 가고 싶어요. 지금 가면 탱고가 잘 될 거 같은 기분이에요.”
그의 마음은 여기 없기 시작한다. 그의 눈 안에서 내가 소실된다. 온 누리가 봄이니 이 빙판이 녹아 흐르기 전에 어디론가 가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춤이었다. 그는 자기만의 비가라도 얻은 듯, 주저함이라곤 없이 걷는다. 능숙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언정, 혹한을 통과한 그의 발끝에는 첫서리의 특훈인 양 자신감이 한 발 한 발 묻어난다.
“이젠 재미있게 추시네요.”
“스텝에 재치가 느껴진다는 소리 요새 들어요.”
그러나 내겐 가장 달갑지 않은 밀롱가다. 오롯하였으면 좋을 내 생일 이벤트가, 계속 아늑하고 아득해야 할 저녁이 여기 공중목욕탕에서 모두와 얽혀 때를 미는 것으로 귀결되다니. 오늘은 그와 더불어 귀가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이미 누구하고의 탱고도 흔쾌할 리 없다. 나는 신발을 벗어 신발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한 번, 숨을 몰아쉰다.
십 분쯤 전 지젤이 도착해 있다. 걸을 때마다 광택 있는 민무늬에, 부드럽고 얇은 새틴 스커트가 그녀의 몸에 밀착된다. 내가 떠난 그의 품에 그녀가 들어간다. 홀딩한 채 그와 걸어 이쪽으로 온다. 그녀의, 무용으로 단련된 하체의 동선이 치마 안에서 도드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