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가루
여행 단상들
지우개 가루
하나의 여행은 생로병사 여정의 축약이 되고, 그 안에 짧은 사계를 갖는다. 이 단위 속의 사계는 시간의 순서를 밟아가며 오지는 않기에, 겨울 다음날 가을이 오거나 봄 다음 겨울로 역주행도 하는데, 처음부터 순서대로 가 아니었으니 역주행이랄 수도 없다.
지나치게 좋은 순간엔 이 시간이 곧 가면을 벗고 매복한 불행이 튀어나오지 않을지, 그늘이 그물을 덮쳐온다.
이 반대의 상황도 기계적으로 가능하다면. 하지만 쉽지 않다. 무슨 좋은 일이 기다리기에 이리 고될까,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류의 생각은 떠오르기는 하지만 전자의 근심에 비해 믿음의 무게가 그리 실리지 않는다.
낙관이 아니라 밸런스의 견지에서 반대편 가능성을 끄집어내고 믿을 수 있는 영혼이라면 대단할 텐데, 마음의 힘이란 큰 에너지와 노력을 요구하기에, 대강은 마음보다는 미움의 힘에 기대기가 더 쉽다.
이런 문제를 두고 경험을 종합해보고 싶다가, 제아무리 드라마틱하고 신념까지도 제공할 만큼 만만찮은 무게였던 들, 혼자만의 경험이 갖는 비통계성을 염두에 두고 접어버린다. 현상의 다양함보다는 신빙 자체를 신빙하는 불안한 좌표 위에선, 은밀히 체험하여 실험한 어떤 가능성을 설파한다던가 하는 일도 뭍 원한들의 난도에 재단되니까 삼가 숨겨야 한다. 충족조차도 자족치 못하고 다시금 결핍을 시기하는 도토리 자멸 시대니까는. 힘을 가진 세력에 압박당하는 이상으로, 같은 약자가 더한 약자를 만만히 사냥하여 희생양 삼음이 더 비통하다.
누구나의 손수건
관념 속에선 거대한 세상조차 휴대용 손수건 접듯 한다. 그런데 이 손수건이 실재의 세상에서는, 베여 피가 나는 손가락 하나 싸매지 못하여 절절매기도 한다.
실제의 양감과 용적의 생생함이 불러일으키는 어지럼증으로부터 코피를 막아내고, 재채기를 받아내고, 찬물에 적셔 이마도 식히는 등, 나름의 가상한 임시변통의, 세계지도와 천궁도가 몽땅 그려진, 각자의 휴대용 손수건 낱장들.
소용이 무슨 소용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은, 내게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이다. 내가 널 네가 날 사랑한들 뒤에 저 말을 붙여보면.
소용이라는 말은 가치 지정의 어휘로서, 그 어느 가치라도 감아들여 삼켜버리는, 크기가 소멸된 차원에서 허무의 아가리로 기능하는 흑마법이다.
소용의 권세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하필 꼭 있어야 할 가장 예쁜 것들부터 제물 일 순위가 된다. 정이나 사랑, 작지만 빛나는 순간들이라던가.
마을에서 제일 예쁜 처녀를 지네나 구렁이에게 바치듯.
소용을 따지지 않는, 아예 상정하지도 않는, 가치 매김의 필연을 놓아버리는, 존재 그 자체로 족한, 덧붙이지 않는, 삶을 바라본다.
가치 있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말아야 하나? 존재함이 이미 가치고 나머지 가치들은 죄다 덧붙여진, 이래도 저래도 좋은 것으로 통용된다면, 사람들이 좀 덜 죽어갈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