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도깨비불

by 래연









그다음 주 그는 정말로 왔다. 내가 사는 도시에. 천변 이 쪽에 사는 나는 바가 있는 저 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천변을 가로지른다. 내가 통상, 단골 만화방에 가기 위해 디디던 디딤돌들이 이번에는 설레임의 받침돌이 된다. 폴짝폴짝, 그 길을 디뎌 희미한 불빛이 등대처럼 일렁이는 강 저편으로 다시 태어난 나는 체리핑크빛 앙고라 니트를 입고 있다. 체리핑크는 영혼 세계의 빛깔이라고 누가 그랬나?


밀롱가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그가 도착한다. 나는 반가워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부러 무심함을 가장한다. 그리고 여전히 수줍고 무뚝뚝한 그, 다정한 너스레 한 번 떨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작은 무엇 하나 꾸며 보일 줄 모른다.

“케이 티 엑스 타고 왔어요.”

“그리고 이거......”

한기 묻은 외투 아래로 떨어지는 초콜릿 꾸러미. 소파에 떨어지는 그것을 내가 알아서 주워 든다. 꾸러미를 두른 초록 리본에는 ‘메리스 쇼콜라티에 Mary's chocholatier'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리고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 바깥의 한기 그대로를 담고, 안으로 가둔 외로움을 풀지 않고, 그는 나와 춤을 추었다. 그의 다리의 동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리는 움직였으나 흐름은 멈춘 듯했다. 온기, 그의 손의 온기 때문이다. 내 등의 견갑골을 감싼 그의 손에 힘과 온기가 처음으로 느껴졌다. 어쩐지 이날은 손이 말을 했다. “가지고 싶어. 다가가기엔...... 그러니까 더.”


이젠 내가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 역방향 시선이 시작되었다. 이는, 더 이상, 은밀한 관찰의 대상으로서 무심히 관심만을 받던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제는 서로의 어린 시절이 될 수 없을 터이다. 그곳으로부터 어느새 훌쩍 떠나와 버린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실낙원은 벌써 돌아서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의 사랑스런 대상이 아니라 노심초사 애타 하는 주체로 전락했다. 이제는 강가의 도깨비불처럼 저 혼자 춤추는 내 심장만이 도로 강을 건너간다.




투약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지, 의사는 별반 설명이 없다. 거듭, 최면의 효과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제껏 만나온 다른 상담자들처럼 내 인생의 사건과 감정들을 유도신문하지도 않는다. 다만 두 번째 면담 때 그는 숙제를 내주었다. “여태까지 살아온 히스토리를 쭉 써 와요.”

나는 숙제 중독자처럼 몰두하여 썼다. 스스로 도취되어 눈물을 쏟아가며 무려 A4용지 스무 장에 걸쳐 연대기를 적었다. 거기에는 다양한 학대의 이력이 포함되었다. 친지 교사 교수 등 대상도 다양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이야기들, 여태 어쩌자고 살아왔나 싶어 한동안 바닥에 엎어져 있기도 했다.

그 연대기를 제출할 때 의사는 분량의 과도함에 약간의 놀라움을 표했으나 그다음 면담 때는 그 자료를 독서한 징후로 보일 만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약간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그는 연거푸 최면의 이로움과 효과를 역설하며 면담을 마쳤다. 이래서야 라포 형성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최면에 걸릴 수나 있을까? 혼잣말했지만, 만일 최면이 라포와는 별 상관없이 의사의 주술적 카리스마가 주도하는 레드선의 마법에 의한 거라면 혹여 걸릴 수도 있겠거니 했다.

이전 05화 털실로 짠 그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