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을 마친 교습생들은 삼삼오오 저녁을 먹고서 저녁 밀롱가로 향한다. 밀롱가는 교습의 연장처럼 된다. 방금 전 레슨에서 배운 동작을 써먹어보며 각자 자신의 춤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저녁의 바는 하나둘씩 몰려든 사람들로 11시 이후엔 비등점에 달한다.
그런데 로돌프를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은 레슨 듣기 전보다 항상 덜 춥다. 바람이란 게 한쪽 방향으로만 거세거나, 우리들이 지하 스튜디오에서 한바탕 왁자지껄하게 나눈 온기가 바깥 추위를 압도하는지도 몰랐다.
그 길을 걷다가 그가 입을 연다.
“어제 토요 밀롱가에서는 너무 행복했어요.”
아아, 이제야 확인된다. 게시판에서 그의 글을 보았었다. 그것은 ‘어제는’ 이란 제목의 글이었는데, 클릭하자 커다랗고 진한 글씨로 ‘아주 행복했어요.(냉무)’라는 한 줄이 전부였다. 그 행복의 이유를 이제야 확인한다.
그러나 정작 그 행복했다는 어제 밀롱가에서 그는 평소와 다른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거의 식별하기 어려운, 겨우 조금 더 앙양된 미소만을 띠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제 올리신 글, 그거 보구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여태껏 다정하고 차분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열정적이고 영적인 분이시군요.”
아아, 그것은 ‘어젯밤 숲 속의 용광로에서 자기를 녹이던 그녀는 누구였던가?’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장황하고도 격정적인 글이었다. 이 글은, 일상에서의 불성실과 정서적 하자를 탱고를 피난처 삼아 쉬 위로받고자 하는 뭇 땅게로들을 꼬집는 의도의 글이었다. 탱고를 마약 삼아 탱고의 신성성을 해친다는 등의 궤변이었다. 일상과 순간을 무시한 채, 별세계의 솜사탕만을 구하는 인간군상의 나약함을 경멸하는 내용이었다. 바로 이런 글:
어젯밤 숲 속의 용광로에서 자기를 녹이던 그녀는 누구였던가?
밀롱가 그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꽤 자주 서먹하게 낯설다.
마치 자고 있는 동안, 밀롱가에서 벗어 태워버린 껍질보다 더 텁텁한 껍질이 밤사이 새로 입혀져 있기라도 한 듯이.
밀롱가에서 매번 부활하곤 하던 그 미지의 인물, 혹은 '나'라고 하는 타자는 일상에서는 부재중이다.
왜 사람들은 이 저주받은 소용돌이에 투덜거리며 빨려 들면서도 그 공간을 떠나지 못할까? 왜 다시금 회귀하는가.
우선 떠오르는 것은 '고통의 확인'이다.
땅고 속에선 일상에선 드문 합일의 상태를 잠시나마 만나게 되어 위로를 얻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해진 세팅으로부터 유래하므로 그 안에서는 '진정한' 것이지만 자아는 바깥 세계로 나와서는 그것을 '가상적'이라 느끼게 된다.
땅고의 위로는 대개 근본적인 치유에는 이르지 않을뿐더러, 합일에서 오는 위로가 클수록 현실 공간에서는 삶을 더욱 배반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고, 이런 과정에 의해 버림받은 감정에 침몰해 들어갈 위험성도 크다.
모든 감정 작용은 아주 양가적인 고로, '합일'을 원하였으되 그것의 성취가 영구적이지는 않을 때, 다시 애초의 견고한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독립'의 에너지 쪽으로 튕겨져 나가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 기껏 밀롱가에서 제법 만족스러운 걸음을 걷고서도 갑자기 그 문 밖에서는 씁쓸 시큰둥해지면서 '이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거듭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땅고의 위로가 오히려 확인시켜주는 것이란,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아픔과 답답함의 목록들이기도 하다. 이런 '땔감'들은 위로라는 온기에 점화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은폐, 잠복된 채로 쌓여있다. 땔감의 문법은, '누구나 고통 속에 살지, 그러니 내 것을 티 낼 필요도 없고 과하게 느끼지도 말자고.' 하는 식이다. 그것들은 감정이란 항아리 속에 쑥쑥 눌러 담겨서는, 별 다른 출구 자체를 깊이 체념한 채 심지어 망각의 층으로 내려가 변색되어 있기도 한다. 땅고 없이는 어차피 그런 삶을 반복할 것이었다.
사람은 당연히, 무언가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거나 숨기고 싶어 진다. 자기 정서를 일상적인 적당한 무감각 상태로 다시 중화시켜놓고 싶어 한다. 땅고에서 느낄 수 있던 위로나 여타 강렬한 감정들은 일상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서 땅고적 쾌감을 부인하거나 끊고 싶어 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낙원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고 기억한 순간부터, 거기서 추방되어 일상현실로 되돌아온 남녀들은, 이마에 땀을 흘려 먹고살아야 하는 고단함 속에 버림받은 영혼을 다시 순간의 안식 속에 건져 올려다 놓을 피안을 바라다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실 속을 유령처럼 배회하다가는, 밀롱가 시간이 도래하면, 마치 방울소리에 이끌려 무리를 찾아드는 양 떼들처럼 돌아오고 거듭 돌아오기를 그치지 않는다.
(중략)
이런 글이었다.
그는 왜, 뜨끔한 걸까?
그와 내가 동시 접속한 시간에, 그가 내게 말 걸어주길 기다리느라 동호회에 업데이트된 글들을 모두 읽을 필요는 없다. 서로 로그인해 있다는 약간의 기척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그는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곤 한다.
“안녕?”
“안녕하세요?”
그는 나보다 여덟 살은 많다. 그렇다고 여기서의 안녕은 반말이 아니다. 그가 갑자기 안녕이라고 말하니, 와락 그를 안고 싶다.
“다음 주쯤 로돌프 식구들과 어울려 대전 밀롱가 갈 건데, 계실 거죠?”
“그럼요.”
아닐 리가 있겠는가?
"초콜릿 좋아하세요?”
“그럼요.”
“그럼 그 날 초콜릿 드릴게요.”
그즈음이면 밸런타인 가까이 되려나?
“저어 그리고, 아까...... 그 뭐라 하죠? 단어가 부족해서...... 암튼 그 무용 발토시, 예뻤어요.”
“아, 레그 워머요?”
“예, 그거......”
그는 내가 두른 것들 중 특히 실로 짠 것이라면 모조리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