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한 해가 콧물이 되어 질질 떨어진다. 은하수와 정액은 연결되어 있다. 밤하늘의 별들은 하나의 온전한 사람이 되어보고자 우주의 순환을 타고서 남성의 씨앗 주머니로 간다.
여자만 거대한 생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겨울날 은하수를 바라볼 때는, 여분으로 흐르는 것들을 애도하여야 한다.
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미처 말이 되지 못한 덩어리들을 쓰다듬는다. 그들을 폐기하는 대신 보물 상자에 넣어둔다. 누구의 기억에든 하나쯤 놓이는, 어린 시절 미완의 가능태들만 모아두던 보물 상자. 어디 쓸지 모를 깃털들, 막연히 예쁜 돌들, 선물 포장지에 붙어 있던 레이스들, 더는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의 부품들은 기능을 상실한 것들이 아니라, ‘환기’라는 상위 기능에 편입된다.
유년을 떠나던 날 엎어버린 상자를 뒤로 한 채 이후 내가 가진 것들을 죄다 초라하게 여긴 게 아무래도 나의 가장 큰 죄이다.
“융의 레드북을 찾고 싶은데요.”
“너무 좋은 책이라 없을 것 같은데요.”
청년은 마우스를 몇 번 움직여 이동한다.
“다른 사이트들에서 찾아볼게요...... 음, 교보 중고에 하나 있네요.”
청년은 인터넷 중고책 매장의 오프라인 카페에서 일한다. 내가 거기 처음 갔을 때에도 그는 있었지만, 이 카페라는 그림에 어찌나 알맞게 동화되어 있던지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아무런 존재감을 받지 못하였다. 이상하게도, 누구든 어느 정도는 그러하다. 어떤 한 존재가 그가 속한 그림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입체로 떠오르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융 책을 찾을 무렵에야 비로소 이 청년이 내게 그렇게 된 것 같다. 그 이전에 그와 나눈 단 한 마디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분명히 그는 거기 계속 있었다. 내가 예닐곱 번 이 카페를 오가던 동안 그는 변함없이 내 커피 주문을 받아주었고, 내가 고른 책 결제를 도와주었으며, 지난번 런던 사진전 중에 열린 사진작가와의 만남 시간에도 그 자리에서 테이블 세팅이며 커피 리필 등을 도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무신경함은 어린 시절에 비하여 나아진 게 없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어느 날 수업 중 누군가 찾아와 담임 선생님에게 급한 기별을 넣었다. 선생님은 소식을 듣자마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다 조퇴해 버리셨다. 선생님에게 부친의 부고가 도착했던 것이다.
그때 나라는 어린이가 어른들의 사정을 낱낱이 파악하기란 무리였겠지만, 왜 일찍 귀가했느냐는 어른들의 물음에 아무렇게나 대꾸해버렸다. 선생님이 배가 아픈가 봐......
이후에도 매사가 그따위였다. 주변 사람들의 일에 대해 통 더는 알려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인연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 은하수로 귀환한 정액이 되어.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인연 하나가 커다랗게 보이면, 마음이 급해져 아이처럼 조바심을 내며 단번에 확 움켜쥐려 들었다. 주로 그런 인연들은 내 뺨을 세게 때리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은하수엔 폐기된 정액들이 수북해졌다. 참으로 인연의 수태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