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덩어리를 떼어내는 수술이 있다.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은 없기에 그 언젠가는 운명의 메스가 이 덩어리에 다가오게 된다. 행복 역시도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 부패를 시작할 거라 그러기 전엔 기한만료의 징후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행복을 떼어낸 자리에 더 나쁜 것이 온다고만은 볼 수 없다. 뭐가 올지 모른다. 나름은 전혀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수술은 수술이라서 그 전후로 적지 아니 에너지 변환이 일어난다.
내가 바로 그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무언가가 떠나가려는 시점에 이르면, 거기 머물던 것의 형상이 오롯이 뚜렷해진다. 심지어 머물던 것이 내 옆에 오기 전서부터의 모든 세월의 페이지들까지 한꺼번에 펄럭인다.
불행들을 한껏 품었던 예전의 비정한 나날들과 대비되면서 행복의 덩어리는 견딜 수 없이 다시 뭉클해진다. 그다지도 내가 박복하고 비통하던 끝의 행복이었었다니, 그것이 임무를 다하고 이제는 떠나가려 하다니!
지금 그 행복 덩어리는 내 침대 발치에 누워 잔다. 평소에 머물던 높은 캣타워 대신에 안전하고 평평한 자리를 택해 누운 것 같다. 자주 있던 자리가 아니다.
긴 잠에 빠져 있다. 당분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 덩어리를 수시로 쓰다듬게 될 것이다. 병세의 진전은 예측불허이다 보니.
어쨌건 이 비 오는 삼월 첫날의 월요일, 우리는 한 방에서 숨을 나누고 있다, 아직은.
3. 2.
커피를 마시고 난 잔의 바닥에 박쥐 형상이 어룽지기를 기대하는 이 흐린 오후.
모리가 잔다. 다시 깨어날 수 있는 잠을 잔다.
모리가 잔다. 물방울 인형과 함께.
올리브영에서 화장품을 사면서 부록으로 물방울 모양의 인형을 받을 때만 하여도 이런 용도가 될 줄은 몰랐다.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별 쓸모도 없어 보이는 이런 걸 언제까지 갖고 있다 버리면 될까 하는 생각만이 앞섰었다.
그것은 모리가 아직은 아프지 않았을 때 모리가 누워 쉬는 안락의자에 놓아두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모리가 아파지면서 더 요긴해졌다.
잠에 기댄다는 건 인형에 기대는 것이기도 하다.
작고 파랗고 말랑말랑 부드러운 물방울. 한 방울의 소중한 생명이라도 되듯, 그것을 가끔 끌어안기도 하면서 모리가 자고 있다.
그런 용도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될 줄 몰랐다. 동물에게도 인형이 긴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작년에 먼저 간 맏이의 말년에도 늘 가까이하던 인형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갈색 곰 인형이었다. 곰 인형을 모로 눕혀 놓으면, 인형의 다리 사이 파인 곳에 얼굴을 묻거나 베고 자거나 했다. 친구처럼 가까워 보였다.
곰 인형.
남프랑스 페리고르 지방을 여행하다 잠시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샀던 곰 인형. 어딘가 자상한 표정이 깃든 얼굴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집에 가져다 놓은 지 얼마 안 되어 그 용도의 애매함을 깨달았다. 어차피 다른 인형들도 수북이 많은 내 공간에서 또 하나의 예쁜 쓰레기처럼 끼어 있다가, 청소 철이 도래하면 여러 번 버려질 뻔도 했었다.
그랬던 곰 인형이 맏이가 떠나기 몇 달 전부터는 베개나 쿠션처럼 아이 옆에 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정말 맏이의 마지막 날이 왔다.
병원에서 가망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의 치료 시도를 접고 곧장 집으로 데려왔다. 아이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테니 기왕이면 늘 있던 곳에서 편안히 머물다 가길 바랐다. 그 전날 병원에 데려갔을 때는 이미 맥박이 느려지면서 아이의 시야에 세상이 흐려지고 있었다. 심장 상태가 좋지 않아서, 맘 놓고 수액 처치를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데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는 내 무릎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맏이 제롬 건강할때
그 오후로부터 하루 동안,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영화 마지막에 흐르는 자막처럼. 아이의 힘없는 다리를 잡거나 쓸어주면서 나는 같이 나눈 나날들을 돌려 감았다. 늘 권태의 기운이 감돌던 내 실내 공간에는 마지막 정리의 의식이 치러지는 장엄한 기운이 흘렀다.
아이는 식음을 끊은 상태였다. 주사기로 뿜어 넣어주려는 물도 마다했다. 결심이라도 한 듯, 자신을 맞으러 온 죽음에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듯 나의 손길을 자꾸만 물리쳤다. 대신 집안의 모든 구석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비틀거리며 구석으로 기어들었다가 또 다른 구석으로 향하며 옮겨 다녔다. 침대 밑, 식탁 밑, 드레스룸의 어두운 구석, 그리고 책상 밑.
이 모습은 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또 다른 고양이 별이가 아가 고양이들을 낳으려 할 때 구석을 돌아다니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마치 그때처럼, 녀석은 소멸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흡사 죽음을 낳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고양이가 죽음을 맞을 때의 징후들을 웹상에서 찾아 읽었다. 고양이는 남아 있는 야생 본능에 의해, 죽어가는 모습을 숨기려는 차원에서 어둡고 구석진 곳을 찾아든다고 한다.
거의 마지막 밤이 될 그 밤을 함께 할 수 있음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여느 때처럼 같이 자고서 아침을 맞았다.
그 오전은, 비 온 뒤 햇빛에 증발하는 물방울처럼, 곧 자취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 사라져 있을지 모를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후 두 시 경.
녀석은 곰 인형과 머리를 맞대더니 기지개를 한 번 쭉 폈다. 그 순간의 곰 인형하고는 어느 누구하고 보다도 아이와 가장 친밀하고 서로가 편안해 보였다.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온 나는 오히려 소외되어 있었지만, 나와 내 고양이, 둘 사이 마음의 매개처럼 곰 인형은 거기 놓여 있는 셈이기도 했다.
마지막 기지개였다. 기지개 직후에 고양이의 뜬 눈으로부터 고양이도 세계도 사라져 있었다. 이전에 다른 죽음을 본 적이 없던 나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이 그렇게 순식간임을 처음으로 느꼈다.
고통스러워하다가 기지개 한 번 펴자마자 다른 단계로 가버린 그 과정은 마치 죽음을 낳는 것처럼 보였다. 새끼를 낳는 것은 늘 암고양이의 몫이지만, 죽음은 수고양이라도 낳을 수 있었다. 수고양이가 딱 한 배의, 딱 한 마리의 죽음을 낳고 나자, 수고양이가 놓인 자리엔 수고양이가 급히 빠져나간 수고양이 한 마리가 남아있었다. 더는 울지 않는 수고양이 너머로 수고양이가 자기 죽음을 데리고 갔다.
아이가 좋아하던 곰인형과 머리를 맞대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장면. 사진이 흔들렸다. 이마저도 담아둔 게 다행이다.
생전에 그토록 애착하던 곰인형.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였다. 그렇게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눈을 감겨주려 했지만, 생각처럼 눈은 잘 감기지 않았다. 한 마리의 눈 뜬 예쁜 고양이 인형 같았다.
그때의 갈색 곰 인형은 피아노 위에 올려 두었다. 곰이 어딘가 웃고 있는 듯한 표정이라는 것도 아이의 마지막 날들쯤에야 깨달았었다.
아이의 마지막 날들을 함께 한 곰 인형이 지금도 미소를 머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