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책을 쓸 거예요

by 래연







10년 후의 나를 묻는 인터뷰


아홉 살이다.

뜰의 빨랫줄엔 이불이 널려 있다. 그 한쪽 끝을 벌려 머리를 박고 뭉게구름 속을 통과해간다. 꾸지람도 서러움도 모두 잊는 아이들의 명계冥界, 구름의 터널을 비집어 나온다. 나는 구름을 통과한 햇살의 옷을 입고 있다.

다시 햇살 위를 걷는다. 이렁이렁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어지럽지도 멍하지도 않다. 도리어 모든 게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기억들은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어 넘겨 이마를 가지런히 하고 새 옷을 입은 다음 눈부신 빛을 가로질러 종종걸음으로 반짝이는 나뭇잎들의 환호와 더불어 학교에 간다.

내 영혼의 필연과는 별 관계 없이 날조된 꿈을 그리던 화판을 엎고 세월을 보내다, 이제는 한 번 발견한 빛 속으로 몇 번이고 걸어 들어간다.

나는 어느덧 자발적으로 걸어 이계異界에 와 있다. 덜 알려지고 다소 숨겨진 곳에 끌리는 본능을 따라, 프랑스 안에서도 대도시 파리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 떨어졌다. 삼총사의 고향인 여기서 달타냥과 세 명의 기사쯤 만나면 좋겠다.










낯선 곳에 떨어진 느낌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도착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분반 시험이 있었다. 나는 이 시험에 대해 도무지 긴장감이라곤 없이 방만했다. 시험장에는 어쨌든 앞으로 동기생이 될 한 무리의 친구들이 도착할 것이었다. 흥분되는 일이었다.

시험장은 엉피Amphi라고 불리는, 스탠드형 대형 강의실이었다. 옆에는 좀 귀엽게 생긴, 딱 봐도 일본인임이 분명한 친구가 앉아 있다. 라운드 티셔츠에 긴 웨이브 머리, 술 달린 반장화를 신은 아담한 여자애. 이전 세대로부터 유전된 민족 감정 때문인지 얘한테 신경이 쓰이면서 이 친구보다 시험을 잘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그러나 하필 나는 이 시험을 무시했었고 또 정보에 무지했다. 막상 닥치고 보자 시험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어려웠다. 속도전이어서 시간 분배를 잘 해야 했다. 독해만 해도 텍스트 해독력을 사지선다 형태로 확인하는 게 아니라, 맥락을 완전히 파악한 다음 그것을 ’본문에 나와 있지 않은 단어만을 사용하여 세 줄로 요약하기‘ 같이 듣도 보도 못한 형식이었다. 기다란 지문은 어떤 정치사건을 풍자적인 뉘앙스로 다루고 있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엔 이 문제는 그냥 놔버렸다. 이 마지막 문제를 두고 전전긍긍하는 사이 다른 학생들은 이미 가벼워 보이는 자태들로 서둘러 답안을 제출하고 시험장을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부스럭부스럭 웅성거리는 소리에 안절부절해지면서 나도 어서 나가고만 싶었다. 그래서 안일하게도 시험장을 빠져나와 버렸다. 그런데 문제의 일본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서 모두가 나간 다음에도 시험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진득하게 풀고 있었다.








곧 인터뷰가 기다리고 있다. 듣고 말하는 수준을 보기 위한 시험이다. 복도에는 외국 아이들이 가득 줄을 서 웅성거린다. 눈 푸른 사슴들 같다. 생기 넘치는 그들 앞에 나는 버릇처럼 위축된다. 곧 불려 들어가 지긋하고 진지해 뵈는 여선생님 앞에 앉는다. 안경 너머로 질문이 던져진다. “왜 여기에 프랑스어를 공부하러 왔나요?”


고등학교 때 랭보Rimbaud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Une Saison en Enfer»의 첫 장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후 죽 랭보의 고향에 가고 싶었다, 여기 도착 전 그러니까 바로 며칠 전 샤를르빌에선 랭보가 걸어갔을 뫼즈Meuse강가를 따라 걸었다, 그의 무덤도 들렀다, 여기까지 말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문득 탄식한다.

“시 에무방!”Si émouvant!(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나는 선생님의 이 반응을, 내 말에 의례 붙이는 추임새 정도로 여겨 넘겼다. 며칠 후 알고 보니 그것은 진심이었다. 초급반 담임이 된 그녀는 수업 시간에, 한 한국 여학생이 랭보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시를 읊는데 무척이나 감동받았노라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부오코라는 이름의 핀란드 인이었는데 프랑스인 남편을 만나 귀화해 여기 살고 있었다. 이후 그녀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온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면접 때 그녀의 마지막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10년 후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가 잠시 짬을 둔 뒤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의 책을 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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