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월요일만 되면 선생님은 어김없이 묻는다. “주말을 어떻게들 보냈나요?”
돌아가면서 의무적으로 말해야 한다. 아이들은 케이티처럼 ‘악천후에도 굴하지 않고 피레네 꼭대기까지 올라갔다’는 둥 툴루즈로 유적 여행을 다녀왔다는 둥 여행에서의 모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나는 고작 산책했다거나 빵집에 가 파이를 사 먹었다거나 하는 이야기 말고는 소재가 마땅찮았다. 그나마 그 쉬운 표현조차 시제 일치가 제대로 되어 나와 주지 않아 창피했다. ‘주 느 므 쉬 파 프로므네 이에르.’je ne me suis pas promenée hier.(나는 어제 산책하지 않았어요.)라고 해야 할 것이 ‘주 네 파...’je n'est pas... 식으로 엉켜 나왔다. 아는 것과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별개였다.
늦가을의 피레네, 교내 스포츠 클럽을 통해 주말이면 피레네를 등반할 수 있다.
나의 월요일은, 주말의 이벤트를 보고해야 하는 부담감과 더불어 언어적 고충이 가중되는 시간이었다. 주말 동안 프랑스어를 쓰지 않고 있다가 월요일부터는 프랑스어의 시공간으로 복귀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복귀에는 뚜렷이 존재하는 인식적 문지방 같은 게 놓여 걸리적거렸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내가 언제 지난 주말까지 프랑스어를 쓰고 살았냐 싶게 ‘월요일이 되면 다시 프랑스어가 만들어져 입에서 나와 줄까?’ 하는 바보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다가도 결국 월요일 오후쯤에는 어느덧 프랑스어의 공간으로 귀환하여 활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아닌 게 아니라 타국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는 나도 모를 어떤 뇌의 변화가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이전에는 그리 느껴보지 못한 인식의 상태 속에 자주 들어가 있곤 했다. 이미 익숙하던 모국어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현상이었다. 뇌에 박힌 줄로만 알았던 우리말의 단어라던가 혹은 가수 영화배우 이름이 갑자기 막혀 잘 떠오르지 않거나 했다. 뇌가 재편되면서 인식의 조직이 다시 짜여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나의 자아는 한국어를 말하는 자아와 프랑스어를 말하는 자아로 양분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 두 자아는 내 안에 각각 따로 존재하면서 좀체 섞여들지 않았다.
시간도 그러했다. 낮의 시간은 프랑스어와 외국인에 적응하는 시간이었고 이 낮 시간으로부터 풀려난 저녁과 밤, 베란다에서 달과 나무를 바라보는 시간은 언뜻언뜻 떠오르는 향수의 시간이었다. 침대 매트에 누워 잠을 청할 때마다 아스라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종종, 집 근처의 아브뉘 뒤 릴라(라일락 거리)를 돌면 곧장 자주 가던 우리나라의 거리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내가 경험한 장소들은 내 의식 속에서 공시성을 갖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가장 주변에 있는 무언가가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느낌과 겹쳐져 향수병을 지워주고 달래주는 느낌이란.
세 마리 고양이집의 냥이들
그것은 비단 장소에 대해뿐만이 아니었다. 학교에 오가는 길, 어떤 집에는 정원에 항상 세 마리의 고양이가 있어 나는 그 집을 ‘세 마리 고양이집’이라 불렀다. 그 집 녀석들은 정원의 빨간 자동차 위나 창가 혹은 수풀 속에 있었고 그 셋 중 한 마리는 내 고양이와 같은 고등어 무늬였다. 세상에 고등어 줄무늬 고양이가 어디에나 많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 순간은 잠시라도 나의 고양이와 가깝게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내 고양이들에 대한 향수를 세 마리 집 고양이들과 또 내 주변을 맴돌던 수많은 길고양이들이 달래주곤 했다.
유준의 이모가 그러는데 여기 사람들은 고양이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길고양이들까지도 대개는 행복해 보였다. 학교 가는 길에는 늘 같은 위치에 얼룩덜룩한 카오스 무늬 고양이가 바닥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햇빛을 만끽하곤 했다. 이 고양이에 대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자 반 친구 레안과 릴리도 “나도 그 고양이 알아!”라고 했다. 오가는 누구나 고양이들을 예뻐하고, 고양이뿐 아니라 새들에게 주는 먹이그릇과 물그릇이 오가는 길목 구석마다 놓여 있다.
몇 해 전 가을, 재개발 지역 흉흉한 폐허 속에 남아 있는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곤 했었다. 굶주림이나 추위 등 열악한 생존 환경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사람들이 모진 자기 삶에 대한 멸시과 증오를 고양이들에게 투사시켜 이 거리의 아이들을 학대한다는 것이다. 고양이들을 챙기다가 욕이나 잔소리를 들어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들의 삶이 좀 더 여유로워지면 마음도 누그러져 주변의 고양이들을 예뻐하게 되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도 이 삶을 떠도는 황망함을 잊으려는 듯 스스로를 잠시 집고양이라 착각하며 살아가는 길고양이 신세 아니던가!
내 다시 태어난다면
파리 몽마르트르 아멜리에네
동네 작은 골목 카페 신사로
칵테일이 삼바를 추는 그 곳
아코디언 어깨에서 구성진 울음 내어
박수를 받으리
다시는
도망가는 마음으로 밥을 먹고
온기를 구걸하지 않으리
뜨개질 할머니의 무릎 고양이가
되지 않아도 좋아 근사한 베레모자도 필요 없어
느긋이 골목 걷기만 해도
신사 대접 받으리
우아한 마음들의 상냥한 공기
이번 삶에선
쏟아지는 멸시와 이유 없는 증오를
견디는 연습을 해
저들 연습장의 남은 페이지 모조리 찢어버린
사납고 불쌍한 주민들로부터
이 배고픔 이 추위
조금만 참으면 견뎌낸다면
이내 갈 수 있으리
아멜리에 마을로
골목 카페 삼바 아코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