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무슨 나무열매일까?
그 어느 때보다 나무 그늘의 묘미를 느끼는 요즘이다.
날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마침 맘에 드는 벤치와 그늘과 호수가 생겨서이다. 산책하다 작년 무렵부터이 되고서야 여기 벤치에 거듭 앉기 시작했다는 걸 방금 전 발견했다.
벤치란 곳은 누구든 앉고 싶어 할 만한 장소지만, 어쩐 일인지 여간해선 앉기란 걸 잘 하지 않아왔다. 너무도 꿈틀거림이 많은 사람이어설까, 지나가다 벤치를 보면 늘 먹음직하다 여기면서도 그 쉬운 앉기가 되지를 않아왔다. 늘 '그다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발을 옮기지 않곤 못 배겼다. 그다음에는 그다음 말곤 기다리는 게 딱히 없었음에도.
벤치의 로망을 만끽하는 요즘이다. 어쩌면 벤치에서 그냥 쉬는 게 아니라 나름 할 일이 생겨 자주 앉는가 보다. 뭘 쓰거나 읽거나.
아마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벤치를 길들인 것이. 이어폰 꽂고 걷다 멜로디나 가사가 떠오를 때 우연히 앉아서 쓰고부터 벤치랑 연애가 시작되었다. 벤치와 1일.
기억난다. 해가 기울어갈 무렵이었고 주변에 나는 건 온통 비둘기였다. 거기 비둘기는 거무튀튀한 애들이 많고 흰 아이는 가끔 드물게 껴 있다. 벤치 근처에 떨어진 흰 깃털 두어 개가 흰건반처럼 보였다. 검은 건반이 더 많은 피아노를 오후가 연주하고 있었다. 벤치의 노래도 만들어줘야겠어.
어제서야 떠올랐다.
왜 자꾸 글이란 걸 적게 되는지를.
신경이 몹시 긴장된 채 살아가는 내가 이완을 획득하는 쉬운 방편이어서 그런 것 같다고, 어젯밤 스트레칭하다 문득 떠올랐다. 잡혀 죽었던 자의 기억이 내재되기라도 한 것처럼, 늘 누군가 날 따라오는 것 같고 윽박지를 것 같다는 기분. 그렇지 않은 순간을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그런 순간을 늘려 그 순간들 속에 살아가려는, 이게 쓰기의 동력이어 왔다.
피치 못한 긴장의 상태에 어느 순간 작은 틈이 생겨 그 안으로 예기치 못한 고요가 스며드는 순간.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게 아주 안녕하고 괜찮다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만 같은 것이다.
무언가가 무서워 발을 뻗고 자지 못하던 사람은 그 무언가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해서 대번에 발이 뻗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악마로 변하였는데 그 악귀를 한동안 주변이 방관하며 네가 잘못 느끼거나 오해하는 거라 말하는 날들에 감금된 날들이 오래였다. 잘 못 된 게 아니라고 자신에게 확인시키기엔 충분히 강하지 못해,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면서, 정말은 네가 어디에도 있지 말아야 했다고, 이런 무대에 누가 발을 들이랬나? 넌 첨부터 있지 말아야 할 존재였어,라고 내 속의 누군가 말한다. 이런 내 현실에 대해 내가 가슴으로 느낌을 말하면 누군가, 머리라는 오지랖쟁이가 발달한 누군가는 갑자기 설득이란 걸 하고 싶어지는 것 같아왔다. 내가 어떤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관점이란 걸 가르쳐 주고 싶다는 듯이. 자기라는 어린아이를 광에 가두어 놓았을 뿐인데 그걸 기만하고 자신이 성인으로 진화한 듯 착각하는 누군가. 당신의 어린아이나 광에서 꺼내주세요, 제발.
주변은 그 악마랑 아직도 잘 지내며 신뢰한다.
자기 존재가 이런 식으로 거부당했던 사람은...... 별 수 없이, 사람을 믿고 싶은 마음을 다른 데 투영하며 지내야 한다. 사람 아닌 모든 것에서 사람을 찾게 된다. 이를테면 벤치라던가.
무지하게 무사안일하게 태평했던 나를 되찾고 싶다.
그늘을 실컷 누리다 햇볕으로 나오면, 약간 서늘해 있다가 찜질방 간 기분이 된다. 온도 차, 같은 음계가 옆에 놓인 음계가 달라짐으로써 다르게 느껴지는 유희가 피부에 닿는다. 평화가 권태롭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발생하는 전쟁들을 생각하면 끔찍한 한편 비장하다. 아무렇지도 않음의 가치가 살아나려면 거듭되어야 하는 아무런들. 오후는 비둘기를 건반 삼았고 비둘기는 날개를 들썩여대었는데, 흰 비둘기 날개보다 검은 날개의 비율이 몇 배는 되었다. 검은 비둘기가 스스로를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다. 그건 좋은데, 다수인 자기를 또 표준 삼진 말았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