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눈에 맞는 안경이 있다면 두 배쯤 살만해질 것 같다.
지금의 나이는 모호하다. 누가 보기에 부인할 수 없이 늙은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청춘이 연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으로는 늙음 쪽에 더 가까워져 가는 듯 느껴지면서, 자신의 안과 겉이, 남 보기에 와 자신 속으로 느끼는,으로 이율배반적으로 나뉘는 시기일 수 있다. 이 이율배반은 세상과의 공유 지점과 결별하게 만든다. 향연들로부터는 한 발 떨어져 있게 되는 심리적 위치, 그러나 이렇다고 아직 남은 삶의 가능성들을 놓아 던지고서 죽음을 기다릴 수도 없다. 그건 아직이다.
일단은 애매해진 자신을 마주 보아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다.
아직 점심을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시간이 이른 것이 아니라 나의 상태가 식욕과는 거리가 멀다.
어딘가 나만을 위한, 누구도 지켜볼 이 없는 공터가 있다면 거기에서 공을 차고 싶다.
요 몇 년 사이, 놀이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구체적으로는 눈의 기능저하가 이렇게 몰아갔다.
눈이 좋다면, 단순히 책이나 여타 문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소일거리가 된다. 읽는다는 것은 청자가 되는 동시에 새로이 시작되는 대화에 초대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이전처럼 독서할 수 없다는 것은, 재미난 파티 장소를 알면서도 거기에 도달할 교통수단을 얻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처음 이 현상이 시작될 때의 상실감은 꽤나 컸다.
가능이 줄어드는 세상의 갓길에 서 있다.
오가는 길의 노란 은행잎을 구경하러 길을 나섰다.
여기까지 쓰고 나자, 눈앞의 크림 브륄레와 커피잔의 윤곽이 몽환적이리만치 희미하다. 그만 써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오늘은 이제 그만.
'그만'이라는 말을 더 자주 부드럽게 자신에게 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하지만 글로써 툴툴대기는 여전히 남겨둘 것이다. 사람에게는 미안해져서 고통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글의 안팎을 참관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고.
하지만, 글이라는 필터의 효과를 빌어 미안함을 지워가면서......
2020.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