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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Aug 10. 2023

떠날 때라도 한번은 애틋이




반려인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의 죽음을 생각하며 표현하는 걸 많이 봤다.

많이들 손사래를 치면서 이런 반응이었다.

"알고 싶지 않아, 생각조차 하기 싫어, 할 수 있는 한 이것에 대한 생각은 미뤄두고 싶어!"


자연적인 태도다.

그리고 달리 말하면 유아적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살아가는 일이 마뜩잖으면 '차라리 죽고 싶어!'를 편히 내뱉지만

사랑하는 고양이나 강아지의 다가올 죽음에 대해선 아예 눈 돌리고 마음에 벽 하나를 쳐놓고 싶어 한다.

인간의 죽음엔 얼마간 무신경하면서 반려동물의 그것엔 예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이렇게도 추측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선 혐오 증오를 포함하여 100% 아끼지 못하지만

자신의 반려동물은 이를테면 자기 자신보다도 1차적 애착 대상에 해당하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보다 민감해지면서

혐오나 증오라곤 없이 그 존재를 100퍼 수용하고

그 이상으로 마치 자식처럼 여기는 것이다.


자식이나 아기, 어린이가 죽는 건 자기 자신이 죽는 것보다 훨씬 부조리하고 힘들게 여겨지는

그래서 그것에 대한 생각조차 은연중 금기시되어 있는 그런 영역이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마음에 반려동물은 자식보다 우위를 점하기도 한다.

자식은 자기랑 뜻이 안 맞기도 하지만,

반려동물들은 오로지 예쁘기만 한 천사 같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 존재의 상실에 지독히 아파하기도 한다.



게다가 문화적으로 죽음이란 것을,

삶을 종식시키는, 삶 바깥에 놓인 저승사자 취급하는 의식도 한몫한다.

죽음이란 우리 삶에서 결정적이다시피 한 지대한 이슈임에도

막상 이것에 대한 태도는 회피 그 자체이다.

자연적 반응이다.

그런데 자연적 반응이라 해서 옳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미뤄두고 있단 느낌이다.

우리 사회가 원래 그러했다고는 볼 수 없을 텐데

역사와 문화가 하도 지워져

지금 현대인들의 부유하는 의식 속에선 그렇다.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 인간을 놓고서 그 삶과 죽음을 매김 할 필요가 있는데

죽음을 그저 삶을 끝내어 사랑하던 존재를 다시는 못 보게 만드는 불청객으로만 간주한다.


강물이 아쉽다고 흘러가지 않겠다면 어찌 되는가?

가을 낙엽이 서운해서 떨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겠다면 어찌 되는가?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죽지 않으려는 발버둥은 삶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일으켜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곤 한다.

반려동물에 대한 감정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낀답시고 껴안고 있는 감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게 자기가 사랑한다고 믿는 반려동물에게 보탬이 되는 것인지를,

과연 사랑한다면 한 번쯤 생각해 봄이 당연한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영원히 잡아두고픈 마음만이 사랑일까?

동물의 죽음에 대한 책들을 보면,

여기에서의 삶을 완수하고 떠나려는 동물에 대한 반려인의 집착이

이 동물들이 떠나는 일에 정서적 혼란을 일으켜 방해가 된다고 한다.

막상 그들은 차분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더 살고 싶은지 지금 가고 싶은지, 끝까지 혼자 힘으로 죽음을 맞을지 의사의 힘을 빌릴지

마음의 선택을 하며 죽음을 준비하는데

반려인의 그저 헤어지기 싫어하는 슬픔과 아쉬움의 태도는

동물들의 앞길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 반대라고 한다.


사랑한다면

내 마음 아픈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한 번쯤은 상대에게 필요한 것에 더 다가가야 하지 않을지?


이런 주제에 대해서

반려인들과 편히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적지 않은 경우,

그들 마음속에 무작위로 설정된 금기와 거부가 상당하다.



나는 직접 손으로 보낸 아이가 4마리인데

그때마다 장례식장에서 한 번도 오열하지 않은 내가

정서적으로 불량한가도 생각했었다.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순간은

병세가 되돌릴 수 없단 이야기를 듣고서

이제 헤어지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잠깐뿐이었고

그 이후엔 대체로 초연했다.



내 마음이란 이랬다.

이 헤어짐에서 내 감정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니고

내 마음쯤이야 감당해 내고

사랑을 실어 잘 보내고

이런 걸 가능하게 하는 더 애틋한 마음에서

그나마 내 마음이란 것도 약간은

사랑이란 걸 품고 사용해 보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평생을 내 맘대로 데리고 일방적인 내 방식대로 예뻐하였으니

동물들이 이런 날 받아주었다는 고마움에

슬픔쯤은 감당해 보겠다가 내 사랑이었던 것 같다.


다 그래야 한다는 거 아니다.

누구나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사랑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식을 막론하고

살아가고 예외 없이 죽음을 맞는

이 지구상의 존재로서

죽음에 대해 그저 싫다 나 몰라라 하는 태도엔

좀 더 성숙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끝내 보내는 나날들이란

그전에 희희낙락하던 나날들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랑의 교과서가 펼쳐지고

가장 핵심 정리와도 같은 부분이 속속 뇌리와 가슴에 각인되는

같이 한 삶을 통틀어 가장 intensive course가 숨어 있었다.


죽음을 준비하고 보낸 시간은 동물도 나도 성장의 그래프가 최고조에 달한 구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육체를 벗고 떠나는 상태 전환이

더 높고 넓은 세계로의 태어남이란 사실이 너무도 와닿게 되었다.

그러나 반려인이 오로지 죽음을 거부하기만 한다면

이 모든 기회의 문이 닫힌 채 가동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는 사랑을 소모하는 공간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어울려

더욱더 거대한 사랑을 완성하고 확장하는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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