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
이런 날이 길어질 땐,
슬그머니 슬픈 생각이라도 불러온다.
슬픔은 비할 나위 없는 곡절이라,
삶에 이유와 구실을 대어주기도 한다.
혹은 마음에서 무언가 투쟁하는 골칫거리가 있을 땐
그 역동으로라도 살아진다.
사람이 남의 욕을 하게 되는 심리에 대해 생각해 보면,
정말 욕하는 대상이 관건이지 않을 수 있다 싶다.
그게 좋은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욕을 하게 되는 까닭은
그 기저에는.....
욕이라도 하고 있어야, 적이라도 삼아야
삶에 원랜 있지도 않은 것 같은 내 위치가 잠시 생겨나는 것 같은 것?
원래 아무것도 아닌 건데
자꾸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작게 몸부림친다.
바람에 장미가 흔들리는 것만큼의.
장미는
내가 장미니까, 하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영장이라는 것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
으스대고 유난한 존재라는 것 같다.
잠시라도 이유와 의미를 먹여주지 않으면
지탱하지 못하는 연약인 주제에.
실은 존재하는 것들 중 말단에 불과하다.
여기까지 적고 나자
뭔지 모를 슬픔이라도 올라온다.
이 슬픔을 되새김질하는 힘으로라도
오늘을 살 수 있을까?
가만 음미해 보면
슬픔보다 더한 무엇이다.
정처 없음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처 없음이 내 기저고 정체성이고
심지어 원동력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이걸 자주 잊는다.
지금 난 이 정처 없음을 미끼로
슬픔을 쥐어짜고 있다.
살아있음을 덧없이 확인하려는
말도 안 되는 유령처럼.
나는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니기에
책을 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