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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씨 Jan 17. 2022

이순신의 바다, 황현필

: 서평, 이순신에 대하여, 이순신의 역사

#이순신의바다 #황현필



1. 모든 전쟁을 승리한 전설이 된 인물이 있습니다.
2. 지피지기입니다. 적의 전략을 파악하여 판옥선의 상판을 철갑으로 두르는 신종 무기를 전쟁 중에 개발합니다.
3. 그의 전쟁일지는 매일매일의 일기로 남겨져 후세의 사람들이 그의 전쟁을 눈으로 선명하게 쫓아갑니다.
4.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에 그를 폄훼하는 악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5. 왕과 동료가 끝끝내 전설의 뒷다리를 잡습니다.
6. 적국의 모략과 왕의 무능이 합쳐져 전설은 전장에서 물러나 왕의 손에 의해 죽음 직전까지 갑니다.
7. 극적으로 전설은 목숨을 건집니다. 하지만 그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8. 오로지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계급장 떼고 한아름 시름을 안고 전장으로 향합니다.
9. 전장은 그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이미 무너져버린 뒤입니다. 황폐합니다.
10. 다시 시작하는 전설입니다.
11. 다시 그의 전승은 이어집니다.
12. 그로 인해 기울어지던 전쟁의 국면이 전환되었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고 드디어 전쟁이 끝이 납니다.
13.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소설이나 드라마를 쓴다면 독자에게 욕 들어먹기 딱 알맞습니다.

너무나 진부한 영웅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 같은 주인공은

한반도 조그만 땅에서 태어나 한 나라를 구하고 홀연히 전장에서 사라진 실존 인물입니다.

구술로 소문으로만 전해 내려와 과장과 허위가 뒤섞이기 쉬운 고대, 중세 시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종 기록이 고스란히 작성되고 보관되어 온 고작 600년 전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웅 이순신


세종대왕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그를 잘 알고 있는지 되짚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익히 한산대첩을, 명랑대첩을, 그리고 노량해전을 알고 있습니다.

성웅을 둘러싼 선조, 원균, 류성룡을 또한 압니다.

드라마를 통해 영화를 통해 무수히 이순신의 일대기를 접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해 보입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통해 보다 자세한 우리국민의 영웅에 대해 알았으면 합니다.

책 페이지수가 적으면 어쩌나 했습니다.

독자의 반응에 쫓겨 소설을 쓰듯 재미에만 치우치면 어쩌나 했습니다.

그 어느 미디어보다 자세히 정리된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존경하는 전설에 대해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저자인 황현필 작가는 유튜브 역사강사로 유명한 분입니다.

저도 이미 구독자여서 자주 보고 있습니다.

역사교육학을 공부했으며 교사로 7년간 재직 후 학원강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유튜브 ‘황현필 한국사’ 채널은 6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황현필은 최근에 ‘역사바로잡기연구소’를 설립하여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출판사가 그가 설립한 #역바연 (역사바로잡기연구소)입니다.


이 책은 시간순으로 이순신의 출생과 죽음까지 정리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장에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서로 다른 학계의 주장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역사를 보는 재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노량해전에서의 전사가 대체로의 정설입니다만 자살설, 은둔설등에 대한 소개와 그 근거에 대해서도 알려주니 소중한 깨알 정보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당시 양쪽의 수군 전력에 대해 알아봅시다.


우리의 주력 함선은 판옥선이고, 일본의 주력 함선은 세키부네입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크고 튼튼합니다.

바닥이 평평하여 360도 회전이 가능한 반면 속도가 느린 단점이 있습니다.

세키부네는 배 아래쪽이 뾰족하여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어 먼거리 원정에 유리한 배입니다만 회전을 하기에는 바닥이 불안하여 크게 돌아야 하는 불리함이 있습니다.

이런 함선의 장단점에 대해 이순신은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백병전은 우리 수군이 불리합니다.

그들은 이미 수십년의 내전으로 단련된 전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키부네는 함포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조총으로 대응합니다.

하지만 판옥선은 좌, 우에 함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건조되었습니다.

함포는 조총보다 비거리가 길고 위력이 더 큽니다.

이순신이 함선 숫자의 불리함을 이길 방법은 이런 전력의 차이를 잘 알고 대응하는 방법뿐입니다.





[한산도 대첩]


우리 역사상 3대 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년),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년), 이순신의 한산도대첩(1592년)입니다.

한산도 대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산도대첩은 이순신의 세번째 출정입니다.

젋은 적장 와키자카는 73척을 몰고 이순신의 함대로 빠른 속도로 접근합니다.

이순신에게는 판옥선 56척, 거북선 2척이 있습니다.

이순신은 5척의 판옥선으로 와키자카를 한산도 부근 넓은 바다로 유인합니다.

함선 숫자의 열세를 고려해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해협 견내량을 전장으로 선택할 만도 합니다만 넓은 바다로 유인합니다.

혹여 살아남은 적군이 헤엄쳐 육지 통영으로 갈 수도 있고 우리 백성이 많이 살고 있는 거제도로 도망갈 경우 그들의 만행이 예상되기에 무인도인 한산도 쪽으로 유인합니다.

이순신의 학익진에 그들은 박살이 납니다.

아군은 3명 전사인 반면, 일본은 전함 47척 침몰, 12척 나포, 9,000여명 사망하는 쾌거를 거둡니다.


한산도대첩의 승리가 가지는 의의는 비단 대승에 있지 않습니다.

이전의 연이은 해전의 패배와 함께 한산도의 대패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과의 해전을 전면 금지시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육지에서 선조는 성을 버리고 이미 의주까지 몽진을 했습니다만 명나라는 선조를 받아주지 않아 오갈 데 없어 나랏님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일본은 서해를 통해 육군에게 식량과 병력을 보급하는 수륙병진작전을 펼쳐 선조를 잡고자 계획했습니다만 모든 게 틀어졌습니다.

바닷길이 막혀 일본 육군에게 식량 보급이 어려워졌습니다.

북진하려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서 발이 묶여버립니다.

후방부대의 지원이 없으면 포위당할 수 있기에 승승장구하며 무혈입성 평양까지 올라오던 일본군은 여기서 전세의 불리해짐을 감지합니다.

3대 대첩이라 불리는 역사적 의의는 여기에 있습니다.



[명랑대첩]


1592년 임진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2년과 1593년의 이순신의 활약으로 오도가도 못한 일본의 상태로 명나라와 일본간 정전협정을 맺습니다.

정전은 1596년까지 이어집니다.

무능한 선조는 일본군의 모략에 속아 어명을 받들지 않는다 하여 이순신을 죽이고자 한양으로 불러들입니다.

더구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선조의 원균사랑은 원균을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이순신이 없는 바다이기에 무서울 것 없는 일본은 1597년 정유년에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킵니다.

원균은 이순신이 피땀 흘려 차곡차곡 준비한 무적함대를 칠천량 해전에서 모두 소실하고 맙니다.

124척의 판옥선과 거북선 3척은 배설이 원균의 명령을 어기고 밤새 데리고 도망간 12척을 빼고 모조리 수장되고 맙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세의 위기감을 이제야 파악한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백의종군시킵니다.


우리나라 삼면 중 남해 모두를 이순신이 장악했습니다만 이제는 모든 남해가 일본군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순신은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해남에 진영을 꾸립니다.

패잔병을 모으고 둔전을 일궈 식량을 준비합니다만 판옥선은 고작 1척이 더 늘어나 13척일 뿐이며 적진을 누비던 이순신의 용맹했던 부하들은 대부분 원균 아래에서 사망한 뒤입니다.


명랑, 즉 울돌목은 서해 바다와 남해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물살이 너무 세서 ‘울면서 돌아가는 길목’이라는 의미입니다.

한자어로는 울 명 자를 써서 명랑입니다.

울돌목은 우리나라 삼면 바다의 해협 중 물살이 가장 센 곳입니다.



두 번째로 물살이 센 곳이 강화 해협입니다.

고려 시대 몽골을 피해 강화도로 몽진을 했을 때 몽골군은 무려 38년 동안 강화 해협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로 물살이 센 곳이 진도를 끼고 바깥으로 돌아가는 맹골수도입니다.

바로 세월호가 가라 앉은 곳입니다.

진도 위쪽과 해남사이의 해협이 앞서 말한 명랑이고 그 진도의 아래쪽이 맹골수도입니다.


한산도대첩보다 더욱 더 극적인 대첩이 명랑대첩입니다.

13척의 판옥선과 133척의 일본 전함이 만납니다.

13대 133의 대결입니다.

일본군 적장은 이전의 전투에서 이순신에게 형이 죽었습니다.

두려운 이순신이긴 하나 고작 13척뿐이고 백의종군한지 얼마되지 않아 전열을 가다듬기 전입니다.

10배나 많은 일본군 함선입니다.

이순신을 죽이면 나라의 영웅이 됩니다.

절호의 기회이기에 젊은 적장 구루시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돌진합니다.


133척이 달려들자 횡으로 길게 일자진으로 접근하던 13척 중 1기가 뒤로 도망을 갑니다.

적함의 숫자에 질려버렸습니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계속 독려합니다만 뒤돌아보니 나머지 11척도 따라오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습니다.

대장선 1척과 133척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명랑대첩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전투를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전투는 아웃복싱입니다.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고 전략을 통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지장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명랑에서는 미친 전투력을 지닌 인복싱 스타일로 바꿉니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 홀로 133척에 포위됩니다.

판옥선의 옆으로 수척의 일본 세키부네 함선이 바짝 달라붙어 그들이 좋아하는 백병전을 하기위해 함선으로 기어오릅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선보다 높고 튼튼합니다.

일본군이 오르고자 합니다만 경사가 급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물살이 가장 센 명랑입니다.

거친 물살속에 일본군은 바다로 빠지는 이가 더 많습니다.

오래 시간이 지났지만 이순신의 대장선은 쉽게 함락되지 않고 버팁니다.


뒤쳐져 있던 11척의 판옥선이 그제야 대장선을 구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싸우면 패배라 생각했던 명랑해전인데 대장선 혼자 버티는 걸 보니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전투가 끝나게 되면 그들은 항명한 이유로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명랑대첩에서 조선군은 11명 전사, 일본군은 133척 중 31척이 침몰, 92척이 난파, 3,000명의 사망자를 기록합니다.

13대 133을 이겨낸 역사적인 대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군 전략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해전은 육전보다도 더 전함의 숫자싸움이 승패를 가장 크게 좌우한다고 합니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해전이기에 1척이라도 전함이 많은 쪽이 유리합니다.

이순신은 13척으로 133척을 거의 전멸시켜 버립니다.




[노량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자기 땅으로 철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바다를 이순신이 지키고 있기에 철수도 쉽지 않습니다.

명나라와 비밀 협상을 통해 조선군이 도망가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순천 왜성에 숨어서 도망갈 길을 엿보는 고니시 유키나가만은 그냥 순순히 돌려보낼 수 없는 이순신입니다.

조선 침략의 제1선봉장으로 우리 국토를 유린한 장수입니다.

절박한 고니시는 시마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시마즈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조선수군을 몰살시킨 노련한 장수입니다.

시마즈는 노량진 해협을 통해 500척의 전함을 이끌고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접근합니다.

고니시는 300척의 전함을 이끌고 이순신, 진린 연합군을 앞, 뒤로 포위하고자 합니다.

이때 이순신은 83척,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함선은 61척으로 800척의 적함과 싸우게 됩니다.



자 이제 세계사에 남을 양군 합쳐 1,000여척의 해전이 시작됩니다.

정유재란 마지막 전쟁입니다.


이순신은 왜군을 관음포로 유인합니다.

관음포는 육지 안쪽으로 깊게 들어간 패인 지형입니다.

관음포는 일본군에게는 큰 바다로 빠지는 도망갈 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막다른 곳입니다.

배를 세우고 육지로 도망가려는 일본구, 뒤에서 계속 다가오는 배, 다시 빠져나가려고 돌아가는 배.

관음표는 아비규환입니다.

명랑해전 이후로 근접전을 마다하지 않는 이순신입니다.

여기저기서 조총과 활, 함포, 신기전, 조란탄, 비격진천뢰가 난무합니다.

노량해전에서 조선은 판옥선 4척 침몰, 명은 전함 29척이 격침되고, 일본은 전함 200여척 침몰, 150여 척 반파, 100여 척 나포하는 대승을 이끕니다.

그 어떤 해전보다 혁혁한 대승입니다만 우리는 노량해전을 노량대첩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바다에서 우리는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해낸 성웅 이순신이 전사했습니다.

우리는 대첩이라 차마 부를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그의 죽음 이후로 줄곧 후세에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대제학 이민서의 <명량대첩비>에, <효종실록>에, 숙종이 쓴 <현충사 제문>에, 정조의 <홍재전서>에,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성웅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일전쟁 승리 직후 축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국권이 일본에게 피탈당할 무렵, 애국계몽사학자였던 신채호의 글이다.

나는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


우리나라 해군의 다짐을 끝으로 이순신의 역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해군의 다짐.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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