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정의가 될 수 있는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속도와 긴장의 작가였다. 그의 소설은 모험과 음모, 탈출과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를 단숨에 끌고 간다. 그러나 화려한 서사 아래에는 항상 하나의 윤리적 질문이 놓여 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극이 아니다. 이 작품은 억울한 한 인간이 절대적 힘을 손에 넣었을 때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는 도덕의 실험장이다.
젊은 선원 에드몽 당테스는 질투와 음모로 인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다. 그는 인간의 배신과
국가의 냉혹함을 동시에 경험한다.
수년의 수감 생활 끝에 탈출에 성공한 그는 막대한 보물을 손에 넣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는 가난한 청년이 아니라 운명을 설계하는 자다.
그의 복수는 응징이 아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파국을 통해 적들의 삶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그러나 과정에서 자신 또한 더 이상 과거의 순수한 청년으로 남지 못한다.
이 작품은 묻는다. 복수는 정의의 또 다른 이름인가.
당테스는 자신을 신의 대리자라 여긴다.
그는 악을 벌하고 무고함을 회복시킨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의 자리를 차지한 순간 그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뒤마는 복수를 낭만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의 완성 이후 남겨지는 공허를 보여준다. 응징은 성공했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복수는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상처를 되돌리지는 못한다.
복수는 상처에 대한 즉각적 응답이다. 그것은 분노를 질서로 바꾸려는 시도다. 그러나 복수는
과거를 정리하지 못하고 과거에 묶여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당테스의 여정은 복수의 완성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깨닫는다. 정의는 응징을 넘어서야 한다.
응보적 정의는 악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한다. 그러나 회복적 정의는 관계의 복원을 목표로 한다.
당테스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마지막에는 후자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복수는 분노를 해소하는 듯 보이지만 분노의 기억을 연장한다. 치유는 파괴에서 오지 않고
의미의 재구성에서 온다.
자신을 심판자로 세우는 순간 인간은 절대적 판단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의는
항상 불완전하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가 정의의 얼굴을 쓸 수는 있지만 정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마침내 용서와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을 통과해야 함을 보여주는 가장 장대한 응징 서사다.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