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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버헨리 May 28. 2024

달리기는 하지만, 준비운동은 안 하는데요..

나는 운동신경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몸의 유연성은 거의 없는 편이다. 어느 정도냐면, 똑바로 서서 허리를 굽혀서 팔을 바닥으로 쭉 뻗으면 무릎보다 조금 아래에 내려가서 멈추는 정도다. 나는 아마 한 번도 손가락 끝이라도 땅에 닿아본 적이 없는 듯하다.


운동과 거리가 한참 먼 생활을 하고 있던 한 10년 전쯤, 한창 PT가 유행이라 나도 PT를 20회 받은 적이 있었다. 첫째 날인가 둘째 날에 PT선생님이 스트레칭을 이것저것 알려주셨는데, 내가 못해도 너무 못했다. 나는 유연성이 없는 사람이니까...


"원래 유연성이 없는 분들이 있어요,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거라

  해도 안 되는 분들이 있어요, 힘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나는 노력해도 안되는구나. 그때 생각했다. 선생님은 무심코 한 말인지, 나를 격려하려고 한 말이지 의도가 불분명했지만, 그 말은 내 뇌리에 꽂혔다. <아, 노력해도 안될 거라니 당황스럽네>라는 좌절이 아니라, 그 말은 내 머릿속에서 <나는 원래 선천적으로 유연성이 없는 사람이니 스트레칭을 잘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부끄러운 게 아니야, 굳이 노력하지말자>라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가 되어 버렸다.


PT가 끝난 후 나는 헬스장의 기구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그만뒀다. 그 후로 쭉 운동과 담쌓고 살다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나가서 뛰었으니, 달리기에도 준비운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달리기에 재미를 붙이고 달리기 관련 영상들을 시청하다 보니, 사람들이 달리기 전에 스트레칭이나 스킵동작등의 준비운동을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 달리기도 준비운동이 필요하구나... 사실 좀 의외였다. 학교 다닐 때 체육시간에 원래 준비운동으로 운동장 세 바퀴, 다섯 바퀴 도는 게 준비운동 아닌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건가... 달리기가 준비운동이 아니라 달리기 위한 준비운동이 있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나도, 준비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뛴 것은 아니다. 나름 허리에 팔을 올리고 엉덩이를 씰룩 씰룩 한두 바퀴 돌린다던지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쭉 펴고 스트레칭을 하기는 했다. 고작 1분도 안 걸리긴 하지만. 사실 그것도 겨울에나 좀 하지, 평소에는 귀찮아서 그것도 잘 안 하는 편이다.


준비운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영상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준비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PT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나의 의식을 지배해 버려서, 나는 스트레칭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나를 낙인찍어 버렸다.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뛰는 러너 선생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준비운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유튜브 영상에 올라오는 스킵 동작들을 보고 있으면, 3km 5km 뛰는 시간보다 준비운동 시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 시간이면 차라리 조금 더 뛰고 말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처음부터 달리기에도 준비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과 양상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달리기에도 준비운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아 버렸고, 지금까지 준비운동 없이 잘해왔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나에게 준비운동은 오로지 러닝 하러 걸어 나가는 행위와 시간뿐이다. 사실 혼자서 러닝 하러 천변에 나가서 무릎을 배꼽까지 올리고 껑충껑충 뛰는 스킵 동작을 하는 것이 좀 부끄러운 면도 없지는 않다.(저만 그런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에 나갈 때는 준비운동을 하기도 한다. 작년에 참가했던 한 대회에서 대회 시작 전에 준비운동을 하는데 국가대표 출신의 은퇴한 마라톤 선수가 나와서 준비운동을 알려줬다. 그분 말씀이, 뛰기 전에 뛸 때의 심박수로 올려놓고 뛰는 것이 호흡하기에 편하다는 것이다.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 출신이 말씀해 주시니, 유튜버 선생님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신뢰도 가고, 아 꼭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로, 대회에 나갈 때는 나 혼자 스트레칭과 워밍업 조깅을 열심히 하고 있다. 물론 그 후로 나간 대회는 고작 2개뿐이지만 말이다.


사실, 준비운동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마무리 운동도 나는 하질 않는다. 준비운동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나는 유연성도 없고 시간도 없는 사람이다. 나에게 마무리 운동도 역시 집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준비운동은 안 하지만,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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