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 첫 출전.
누구나 잊지 못할 그럴듯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첫 경험이란 얼마나 강렬한가?
지난 글에도 언급했듯이 나는 10km를 한 번도 뛰어보지 않은 채, 얼떨결에 JTBC 마라톤대회 10km 신청을 해버렸다. 그리고, 10km를 처음 뛰어봤는데, <아, 나도 이게 되긴 되네??> JTBC마라톤대회는 11월이고 내가 10km를 처음 뛰었던 그때가 5월이었으니, 그 사이 다른 대회에서 한 번 뛰어보고 싶었다. 런린이지만 JTBC대회는 메이저 대회이고, 참가자도 엄청 많다던데 가서 어리버리하지 않으려면 시험 삼아 다른 대회에 출전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창에 <마라톤 대회>를 검색해 보니 각종 마라톤 대회가 일정 순으로 리스트가 쫙 나왔다. 적당한 날짜와 장소의 대회를 고르다 보니 2023년 6월 10일 <동성제약 도봉 마라톤 대회>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이고, 약 한 달 후 일정이니, 딱히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참가 신청을 하고 한 달 남짓 기간 동안 10km를 두세 번 정도 더 뛰었던 것 같고, 10km는 아니지만, 평상시 루틴대로 일주일에 2-3번은 5~10km 사이를 꾸준히 뛰었다.
첫 대회니만큼 긴장도 되고 많이 떨렸다. 혼런족이라 뭘 어떻게 준비하는지도 몰라서, 직접 인터넷을 검색해서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딱히 준비랄 것은 없지만 마음의 준비라던가 이미지 트레이닝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루트는 중랑천변이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 주로가 있는 지도를 보고 또 봤다. 사실 루트를 본다고 달라질 건 없는데 말이다. 메이저 대회도 아닌 만큼, 고도차가 나와있을 리 만무했으니..
두둥. 대회 당일날 아침.
알람을 듣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전날 준비해 둔 준비물 리스트 체크
-암밴드
-에어팟
-선글라스
-선크림
-애플워치
-바나나
-커피
-물
날씨가 좀 흐려서 선글라스와 선크림을 챙길까 말까 고민을 살짝 했었지만 딱히 무겁거나 부피를 차지하는 물건이 아니어서 챙겨갔다. 대회장에 가서 보니 흐리다던 날씨는 어디 가고 햇빛이 쨍~. 역시 챙겨가길 잘했다.
대회장에 도착해 보니, 몸 푸는 사람들과 각종 행사 부스들 이벤트들, 음악들로 다들 분주해 보였다. 딱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는 그냥 멀뚱멀뚱 에어팟으로 음악만 들으며 구경만 했다. 동호회에서 나온 분들, 가족, 친구들이랑 온 분들, 나이 드신 분들, 군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러너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있으니, I형인 나는 가만히 있어도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대회 전에 VIP들의 소개와 인사말, 준비운동까지 있다 보니, 대회 시작 전에 벌써 피곤함이 느껴졌다.. 아..괜히 일찍 와서 힘만 뺏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회는 5km/10km/하프 코스 이렇게 세 가지가 있었고 여느 대회와 마찬가지로 5km가 제일 먼저 출발했고, 그다음 10km가 출발했다. 어디서 본 것 있어가지고, 초반 혼잡을 피하기 위해 나름 앞쪽에 줄을 섰다.
드디어 출발.
중랑천 천변 산책로에서 뛰는 루트이다 보니, 역시나 폭이 좁아서 초반 구간에는 사람들 때문에 페이스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오버페이스하지 말라고 인터넷에서 수도 없이 봤건만, 일단 사람 많은 구간은 요리조리 피해서 앞으로 나간 다음에 내 페이스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사람들을 피해 앞쪽으로 치고 나갔다. 1km 지났을 때 에어팟에서 들리는 내 페이스는 4분 42초..... 평상시에 4분대로 뛰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4분대 페이스라니, 그것도 4분 50분 대도 아니고 40초대로...아, 너무 빨리 뛰고 있나?
숫자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인지, 숫자를 음성으로 듣고 보니, 갑자기 나 너무 힘든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km, 3km 가면 갈수록 10초씩, 그다음엔 20초씩 페이스가 꾸준하게 느려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역빌드업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 5km에서 반환점을 돌고 7km쯤 되었을 때 (나에게만) 큰 사건이 발생했다.
너무 힘들어서 언제 끝나지 언제 끝나지라는 생각만 하고 뛰고 있었고 어느 다리 밑을 지나고 있었다. 자원봉사 나오신 분들이 우래와 같은 박수소리로 열심히 응원을 하고 계셨고, 나는 거기가 마치 결승점인 줄 알았던 것이다. 내 앞에 뛰던 분이 그 다리 밑에서 갑자기 멈춰서 운동장 스탠드 같은 계단에 앉아 버렸고, 나는 여기가 결승점인 줄 알고 나도 같이 스탠드로 가서 벌러덩 누워버렸다.
너무 힘든 와중에도, 벌써 10km인가?, NRC앱 기록은 7km인데 GPS가 튀었나? 결승선인데 왜 뭐가 이렇게 초라하고 아무것도 없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누워서 눈을 감고 숨을 몰아 쉬고 있는데, 자원봉사자 한 분이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숨을 헐떡이며)아, 네네, 괜찮아요
눈을 감고 누워서도 왜 결승선에 아무것도 없는지 좀 의아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하프 코스 뛰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 사람들이 여기가 결승선인 줄 착각할까 봐 출발할 때 보이던 구조물(?) 같은 것들을 다 치운건가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15분쯤 쭉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켜 앉아서 눈을 떴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뛰고 있었다. 음, 역시 하프코스 뛰는 분들 열심히 뛰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찰나에 뛰는 분들 배번호 색상을 보니 나랑 색상이 같았다. 나랑 색상이 같다는 건 저분들도 10km 코스 뛰는 사람이라는 건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나 여기가 10km 결승선이 아니었던 것이다. 몹시 당황했지만, 몸은 자동 반사처럼 자리를 박차고 있었다. 기록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첫 대회이고 10km까지 무조건 완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15분을 쉬고 일어나서 뛰려니, 다리가 잠겨 버렸다. 다리가 무거울 뿐더러 다리에 힘도 다 풀려버려서 다시 뛸 수가 없었다. 뛰다가 무릎이 꺾여 그냥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아 그래, 걷뛰라도 하자> 그냥 즐기자.... 그렇게 나는 암밴드에서 아이폰을 꺼내 들고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으며 걷뛰를 하며 10km 결승점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왕 망한 거 즐기자는 마음으로 사진도, 동영상도 찍었건만 나중에 보니 사진이 죄다 흔들렸다. 손도 힘이 다 풀렸었나 보다.
결승선을 통과 후 NRC기록을 보니, 1km 페이스 4분 42초/ 7km 페이스는 5분 42초였다. 그리고 쉬었다 다시 뛴 그 후는 NRC기록은 하지 않았다. 마라톤 대회 공식 기록은 <1시간 8분 26초>였다. 연습 때보다 10분 이상 느린 초라한 기록이었지만, 나도 공식기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고, 걷더라고 끝까지 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은 첫 대회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그렇게 끝이 났다.
여기서 끝인 것 같지만,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