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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버헨리 Jun 18. 2024

첫 대회의 추억은 누구나 있다(2)

(1) 편에 이어서...


결승선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물을 찾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페트병에 든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걸 보니, 간식 꾸러미에 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서, 지나가는 분에게 물어서 겨우 찾아서 간식 꾸러미를 받았다. 비닐봉지 안에는 빵과 물 그리고 완주 메달이 들어 있었다. 빵과 메달보다 일단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짐 보관소에서 짐을 찾아서 한적한 잔디밭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많은 러너 분들이 잔디밭에 앉아서 화기애애하게 얘기도 하고 간식으로 나눠준 빵도 먹고 옷도 갈아입고 있었는데, 나는 딱히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 옆을 둘러보니, 나처럼 혼자 오신 분 한 분이 잔디밭에 앉아서 쉬고 계셨는데, 마침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고 있었다.


첫 마라톤 완주가 기쁘기도 하고, 결승선을 착각해서 억울한 마음도 있고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 내가 먼저 그 러너분에게 말을 걸었다. (나 I형 인간인데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는지...)


처음에 뭐라고 말을 걸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분이 신고 있던 신발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바로바로 그 유명한 <나이키 알파플라이 2> 쨍한 오렌지색 러닝화였다. 그 당시 내가 러닝 초보였지만, 러닝화를 바꿀 때가 돼서, 열심히 러닝화 공부를 하고 있던 때라 한눈에 알아봤다. 저런 비싼 고오급 기능의 카본화를 신으신 분이라면 분명 러닝 고수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게다가 몸도 빼빼 마른 일반 러너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약간의 근육질의 다부진 체구의 러너였다.


우락부락한 인상과는 다르게, 대화를 해보니,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그분도 혼자 와서 심심했는지 생각보다 말을 많이 하셔서 본의 아니게 아주 즐겁고 유쾌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분의 러닝 경력을 일단 한 줄 요약하자면, 러닝 9년차이고 군대에서 러닝을 시작했다고 했다.(대충 그의 나이는 30대 초중반으로 짐작이 된다). 코로나 시절 오프라인 마라톤 대회가 없어져서, 대회는 오랜만에 나온 거라고 했다. 풀타임을 뛰는 러너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가 10km에 참가한 이유가 참 재미있었다. 그는 바로 순위권에 들어 상금을 타기 위해 출전한 것이었다. 고수 중의 초고수였던 것이다. 잘 뛰는 러너들은 10k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이번에 순위권에 들지는 못했지만, 10위권 정도의 순위로 들어왔다고 했다. 맨 앞 선두 그룹에서 뛰었는데 나중에 들어와서 보니, 그들은 일반인이 아니라 엘리트그룹(선수들)이었다고 한다. 그들 따라가다가 초반 오버페이스한 게 오늘의 패인이라고 덤덤히 얘기를 해주었다.


이 분은 러닝뿐만 아니라 운동에 진심이었는데 퇴근하면 매일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러닝은 일주일에 2-3회 정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회에 나오기 위해 3개월 전부터 금주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이 대회 때문만은 아니고, 앞으로 나갈 대회들이 몇 개 더 있다고 했다.


 러닝 고수 앞에서 쭈구리가 된 느낌이었지만, 나의 이야기도 덤덤하게 그에게 해 주었다. 그분도 나의 마라톤 첫 출전, 그리고 결승선 착각한 얘기를 많이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하면  곧 10km 40분대 중반까지는 무난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덕담까지 해주었다. 그렇다. 1년이나 지났지만 내가 아직 10km PB기록이 49분대인걸 보면, 역시 그의 말은 덕.담.이었다.


9년 경력의 초고수 러너분 말에 의하면 러닝 인구가 예전에 비해 진짜 많이 늘었고 실력들도 많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10km 40분대 후반만 돼도 빠른 편이었는데 이제는 40분대 초반 정도돼야 동네에서 러닝 좀 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분 기록이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대회 기록은 39분대 혹은 40분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결승선을 착각해서 비록 1시간 8분 26초의 기록으로 들어온 첫 마라톤 대회의 아쉬움은 러닝 고수를 만나 즐거운 대화로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별 거 아닌 대화였지만, 혼자 러닝 하다가 처음으로 러너와 러닝에 관한 대화를 하고 나니 기분도 다시 좋아졌다. 주변에 러너가 없을뿐더러, 맨날 혼런만 하니까, 평소에 이런 공감대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는데, 즐겨보는 러닝 유튜브 얘기까지 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수는 5km, 10km 뛰고 고수는 하프, 풀코스만 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좀 충격적이기는 했다. 게다가 마라톤 대회를 위해 금주까지 하는 분이 있을 줄이야....


나의 첫 마라톤 대회는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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