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얀 비밀 (한송이)

by 허 당

함박눈 내리는 밤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는 길을 걸었다. 이미 깊은 어둠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지만, 도심을 가득 채운 밝은 조명들조차 오늘은 눈발에 가려 흔들리는 듯했다. 짧은 시간 내린 눈이었음에도, 차량들은 번호판을 간신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하얗게 덮였다. 이 눈으로 인해 수도권 퇴근길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덮인 밤길은 고요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행인들의 웃음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가 한낮처럼 밝게 울려 퍼졌다.


출처) 저자, 한송이, 하얀 비밀, 혼합재료, 가변크기, 2025

어둠 속 세 개의 빛,

치유의 미학


며칠 전 마주했던 한송이 작가의 설치 작품 <하얀 비밀>이 이 밤길의 풍경과 겹쳐 떠오른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공간은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거리의 가로등처럼 단 세 개의 조명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밝다기보다는 사물을 겨우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침침한 불빛이었다. 서늘하게 감도는 기운은 작가 노트에 담긴 '비밀'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내가 섰던 세 개의 관객 참여 공간 중 하나의 불빛 아래, 하얀 백지에 쓰인 흔적들은 마치 공기 속으로 산화되어 흩날리는 듯했다. 작가는 관람객이 백지 위에 이야기를 적기를 바랐고, 나는 그 글자와 문장들이 곧 사라질 것임을 믿으며 몇 자의 문장을 흘려보냈다.

출처) 저자, 한송이, 하얀 비밀, 혼합재료, 가변크기, 2025

작가는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가 노출되는 데 대한 불안감을 고백하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치유와 해방감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의 깊이를 직접적으로 가늠할 수는 없으나, 예술적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였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내면의 문제를 외부로 표현하고 발산함으로써 고난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관람객이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치유 미술적 체험은 간접적 효과를 제공한다. 타인에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라도, 외부로 꺼내어 풀어놓는 행위 자체가 해방감을 주며, 결국 그 흔적들은 조만간 사라져버릴 테니 말이다.


함박눈이 칙칙한 도심의 길을 가려주었지만, 이 밤이 지나면 가려졌던 모든 것이 다시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은 포근한 솜이불이 세상을 덮은 듯 따스하다. 밤이 만들어낸 연인의 흰 발자국도, 도심의 하얀 얼굴도 결국 사라지겠지만, 이 순간의 행복을 즐기는 것은 오롯이 누리는 자의 몫이다. 흰 종이 위에 기록되었던 단어들과 전시 공간을 부유하던 푸른 글들은 이처럼 따스한 빛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출처)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한송이, 하얀 비밀 리플릿, 2025

사적인 정보 노출과 불안


2020년 개봉된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사이버 범죄 스릴러로, 스마트폰 없이 살기 어려운 현대인의 불안을 깊숙이 파고든다. 인터넷 대형 쇼핑몰이나 통신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남의 일이 아닌 현실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 개인 정보 노출로 인해 우리는 또 다른 피해나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으며, 심지어는 이미 털렸다는 포기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개인의 사적인 정보 노출이 동반하는 정신적 불안감은 현시대를 관통하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범죄자와 형사 모두 어머니에게 들었던 "너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라는 한마디의 비명과도 같은 말에 충격을 받고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한 인간은 그 말로 인해 범죄적 성향으로 변모했고, 다른 한 인간은 그 범죄자를 추적하는 운명에 놓였다. 이는 부모가 자식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내뱉은 말로, 자식 스스로도 존재성을 부정하게 만든다. 비슷한 상황의 영향을 받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인간이다. 그러나 카가야 형사는 여자친구의 힘으로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치유의 과정을 겪어낸다.


숨기기의 역설, 예술의 치유적 힘

한송이 작가는 미술이 가진 치유의 힘이 자신의 작업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이 에너지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잘 ‘숨기기’ 위한 다양한 재료와 표현 기법의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고 밝힌다. 작가가 말하는 '숨기기'는 시각적인 은폐를 의미하지만, 그 이전에 '드러냄'이라는 행위가 선행된다. 트라우마적 불안은 감추기 전에 외부로 꺼내어 직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곧 예술이 가진 치유적 힘의 근원이 된다.




*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붙잡힌 살인귀: 원제 スマホを落としただけなのに 囚われの殺人鬼, Stolen Identity 2, 2020, 상영시간 118분, 감독 후쿠다 유키, 주요 출연 치바 유다이(카가야 형사), 키타가와 케이코

* 1편 연쇄살인범 우라노가 체포된 후 벌어지는 사이버 범죄를 다룬 일본 스릴러 시리즈의 속편으로. 우라노 체포 후 산속 백골 여성 시신 발견으로 사이버범죄팀 형사 카가야가 교도소 우라노를 면회한다. 우라노는 블랙 해커 'M'이 연루됐다고 폭로하며, 카가야의 여자친구 미노리가 가짜 와이파이로 해킹당해 위치 추적·스토킹 피해를 입는다. 경찰 조직 내 사이버 공격이 확대되며 인터넷 사회 공포를 그리는 영화이다.

* 원작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시가 아키라 저, 북플라자, 2017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붙잡힌 살인귀> 시가 아키라 저, 아르누보, 2019


By 박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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