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31 WORKERS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31 WORKERS (24) 공공기관 직장인 L과의 대화

by 브루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내가 취업할 쯤부터 사회에 등장했던 이 단어는 2021년 현재 직장인들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다. 오늘 만나볼 L은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공공기관'으로 취업한 L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1.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작은 공공기관에서 5년 조금 넘게 일하고 있는 평범한 월급쟁이 L입니다.


Q2.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정부가 직접 수행할 수 없는 공공사업들을 관련 법령에 따라 운영하는 법인들 중에 한 곳입니다.

그런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재직 중이고, 지금은 본사에서 작은 사업파트의 운영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Q3. 왜 이 일을 선택하셨나요?


직업(직무) 선택에 있어 거창한 비전과 포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학부 전공도 재직 회사와 전혀 관계없고, 저는 사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려다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케이스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 졸업 수년 전부터 갖추어 놔야 할 소위 ‘스펙’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업 준비를 하게 되었고, 당연히 ‘블라인드 채용’을 채택한 공공분야가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러 환경적 요인에 의해 진로가 변경된 상태라, 커리어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지도 않았고, 그래서인지 스펙도 많이 보지 않는 데다, 워라밸까지 좋은 공기업 쪽으로 방향을 정하여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펙도 많이 보지 않는 데다 워라벨이 좋은 공기업'이란 표현이 수많은 취준생들이 왜 공기업에 취업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표현인 것 같아요. 그래도 사기업 취업보다 공기업 취업이 더 힘들어 보이는데, 사기업을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세요?


받아주는 회사에서 일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 가리지 않고 되는대로 지원은 했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것이 인생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워라밸을 챙길 수 있는 기업 위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야 제가 하고 싶었던 대학원 공부나 여가생활에 투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Q4. 이 일을 하려면 어떤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할 수 있나요?


먼저, 특정 사무에서 수행하는 업무, 필요한 능력 등을 체계적으로 분류해놓은 ‘국가 직무능력표준(NCS)’이 있습니다. 공공분야에서 추가 인력이 필요해지는 경우, 해당 직무에 요구되는 능력에 대한 평가를 NCS에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필요 업무능력을 서류(및 자소서), 필기시험, 면접 등으로 검증하여 해당 직무를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원자를 선택합니다. 따라서 공기업(공공기관) 지원 시 1차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점은, 채용공고에 함께 고시되어 있는 해당 직무 설명자료(국가 직무능력표준을 보통 발췌하여 첨부합니다)입니다.


하여, 어떤 업무를 수행하고,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미리 파악을 한다면, 미리 준비해야 할 기술 자격, 자소서의 방향, 면접 시 중점적으로 강조해야 할 경험들을 정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도 근무 중인 회사의 사업과 어떻게든 연관되는 경험들을 면접에서 많이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실제로 면접장에서 그 부분들에 대해 추가 질문도 있었고 좋은 리액션을 받았습니다.


Q5. 일을 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과 힘들었던 기억은?


생각보다 공익 제도나 사업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셔서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한 푼이 아쉬운 저소득층의 고객에게 적절한 제도를 안내해서 당연히 누리셔야 할 복지 혜택을 받게 해 드리면, 나중에 찾아오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몇 번씩 하고 가시는데 그럴 때 가장 뿌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공공분야 업무에는 ‘악성 민원’이 가장 힘든 요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장의 대면 업무 인력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고객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대기시간이 조금 길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고객분께서 대기번호를 무시하시고 본인 업무를 먼저 해달라고 하셔서 대기번호 안내를 도와드리는데, 기다리기가 힘드셨는지 감정이 격해지시다 사무집기를 집어던지시고 험한 말씀들을 하신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 (제 성질머리대로 대응 못하고) 받아주고 이해해야 하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악성 민원은 서비스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 어떤 방법으로 이겨내셨어요? 그리고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마다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방법이 있을까요?


한 국회의원의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하여튼 열심히 해야지 방법이 없어요”라는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네요. 과정은 힘들었지만, 저의 경우 그때부터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고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보직 변경 및 전보 요청을 했고 지금은 본사에서 사업관리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잦은 보직변경과 전보가 공기업(공공기관)의 단점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성향과 맞지 않는 업무를 담당하거나, 관계가 좋지 않은 관리자와 동료와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 의외의 장점으로도 작용하더라고요.


Q6.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본인의 롤모델은?


롤모델을 따로 두고 일하지는 않습니다.


롤모델을 두고 일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입사 초기 5년 차라 그런지 사내에서는 롤모델로 삼을 만한 분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매너리즘에 빠져가는 공공분야 특징 때문일까요.


롤모델이 없다면 반대로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반대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일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신 케이스가 있다면요?


아래 질문의 답과 비슷할 것 같은데요. 본인과 팀의 업무에 책임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중요 업무를 수행하는데 팀원에게 기획부터 사내 최종 보고까지 모두 맡겨버리고, 문제 발생 시에 부하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상사의 경우를 너무 많이 경험을 했던 것이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Q7.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공기관의 특성상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분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책임감 없는 관리자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내 일에 대해 책임감 있게 진행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고객과 다른 직원)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저는 맡은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감 있게 마무리하려고 노력합니다.


공무원이든 공공기관이든 아무리 연공서열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고과 평가는 아예 없나요? 본인의 실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고위 공무원들은 이것저것 보이는 성과를 만들려고 노력하잖아요.


그간의 외부 압박과 정부의 자정 노력으로 인해서인지, 의외로 체계적인 인사평가 시스템을 운영 중입니다. 크게는 정부 정책에 따른 사업을 얼마나 잘 수행하였는지에 대한 객관적 성과지표 수립과 그에 따른 기관, 부서, 개인의 기여도 및 성과를 평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승진 등의 인사운영을 하는 것이고요. 다만 승진을 위한 최소 소요연수 등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먼저 입사한 사람이 보통 먼저 승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승진 욕이 많지 않고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자’라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아무래도 사기업에 비해서는 많다 보니, 앞서 말씀드린 ‘무책임 직원’을 왕왕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Q8. 현재 본인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


전국구 공공기관에서 일하다 보니, 지역으로의 인사발령이 수년마다 한 번씩 있어, 한 지역에 고정되어 일하지 못한다는 점이 조금 불편합니다.


순환 인사가 거주지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단점이면 단점으로 작용할 것 같아요. 회사 때문에 이사를 하게 되면 회사에서 나오는 지원은 있나요?


인사발령으로 인해 주거지를 이동하는 경우, (아마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러할 텐데) 회사 소유 기숙사(사택)를 제공하거나, 이사 등에 필요한 실비를 지원합니다. 좋은 회사들은 주거비용(전세자금 등)을 빌려주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Q9. 5년 뒤 본인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승진한다면 감사하고) 똑같은 모습으로 다른 사업파트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인터뷰 답변을 들으면서 '일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을 나눈다면 개인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회사 퇴근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책을 보거나, 악기를 배우기도 하고, 여행을 가거나 요리를 해보기도 합니다. ‘자기 계발’ 보다는 ‘자기를 보살피는 것’에 중점을 둔다고 할까요. 하루의 대부분을 남이 시키는 일을 했는데, 나머지 몇 시간은 ‘고생했다.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해’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큰 업무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직종이어서 가능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무래도 본사의 업무부담이 조금 더 크다 보니, 본사에서 나가게 되면 하려고 했었던 석사 공부를 해볼 계획도 있습니다.


Q10. 본인에게 일이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 인생계획에 없었던 취업이었기에 워라밸을 최대한 고려하여 직장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일은 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직업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본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어찌 보면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내가 온전히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저에게 중요한 가치인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경험할 때 행복하고 즐거운지를 알고, 그대로 사는 것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직업’을 기반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차선을 택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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