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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Dec 06. 2016

슬럼프에 대해

예상할 수 없는 때에 문득 젖어들고, 빠져들고 있음을 지각하든 혹은 직감하든 달리 막을 묘수도 없으며, 한 번 빠지고 나면 그저 시간에 의존해야 하는 슬럼프는, 그 인과의 양상마저 모든 행위를 무력화시키는 그 본질적 특성을 타고 났나 보다. 이제는 슬럼프가 주는 좌절감에 익숙할 만도 하지만, 나는 번번이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과 자조에 휩싸이고 만다. 나는 어떤 깊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깊음이지만, 남들이 봤을 때는 결코 깊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고민들에 매몰되어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른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함에도 억지로 한 무언가들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내보일만한 무언가를 만들지도 못하는 나에게, 슬럼프는 이렇게나 자주, 요즘 들어서는 아주 습관적으로 찾아온다. 슬럼프 상태가 아니라도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슬럼프까지 겪고 있을 때면 현재를 포함한, 나의 미래 속 온갖 것들까지 비관적인 방향으로 끌려가 버린다. 특히나 말했던 것처럼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찌하기 위한 요란한 노력 끝에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것이 슬럼프라 나는 더더욱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저 행복한 지금 같은 때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은 부당한 것이 아닌가. 이 행복을 온전히 즐길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워낙에 우울감이라는, 어떤 일정한 감정의 기조를 유지하며 살아온 덕인지, 그것을 이제야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래도 억울한 것은 억울하다. 마냥 행복해도 될 때에, 스트레스를 일상적으로 받고 있다니.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분노를 표하기라도 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누구라도 붙잡고 얘기라도 할 수 있는데, 이 슬럼프라는 것은 그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것 때문에 화가 치밀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슬럼프다.   

   

하여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근 한 달간 글을 쓰지 않았다. 글쓰기만 그만둔 것은 아니고, 사실 이것저것에 다 마음을 접었다. 책장의 활자를 따라가야 하는 눈길의 행로가 그렇게나 버거웠고, 영화를 봐도 온통 뾰족한 것들만 눈에 띄는 것을 어찌하나. 귀찮음에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았고, 위로와 힘이 되었던 음악들을 듣기 위해 이어폰을 끼는 것도 답답했다. 결국엔 그것들이 어찌되든 상관없지 않을까, 모든 것들을 부정의 극단으로 밀어내고만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번 슬럼프는 왜 이렇게나 질긴가. 무슨 대단한 발전의 발판이라도 되려는가 싶지만 지금 쓰고 있는 글만 봐도 그건 아니다 싶다. 슬럼프를 극복하고자 쓰는 글이지만 그 시도의 행위만이 그나마 이 글이 가진 사소하고 유일한 의미다. 그럼에도 나는 골몰한다. 어떻게 해야 이 글로써 내가 느끼는 슬럼프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이 글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하지만 슬럼프를 겪으며 쓴 글이 어찌 좋을 수 있겠냐는 합리화와 함께 고민을 그만두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성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도마저 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 유일한 의미라도 살리려면 어떻게든 완성을 해야 한다. 내가 대단한 문호라도 돼서, 나오는 대로 휘갈겨도 무언가를 담게 되지 않는 이상, 무가치한 글이 될 것이 뻔하지만, 잡문 주제에 쓴 사람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면, 그 글이, 답답한 감정의 해갈,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그 사소한 목적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마지막 온점을 찍어야 한다. 그렇게 골몰하다 보면, 슬럼프를 겪는 와중의 무언가를 하려는, 그 노력 자체가 어떤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중에 있기 때문에 이런 주절거림이라도 가능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라, 어떻게 생각해도 슬럼프를 온전히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인정해야할 것 같다. 결국 지금의 쓰는 행위로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것이 옳은 행동인 것인지에 대한 당연한 의문이 떠오르고, 차라리 막무가내로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누워있다 보면 자신의 절망감을 예술로 승화한 다른 이들의 글과, 영화들, 음악들이 떠오른다. 나는 왜 이 절망감을 무엇으로서 승화시킬 수 없는 것일까. 가만히 누워 음악을 듣고, 멍하게 보내는 시간으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어쨌든 내가 바라는 방식이 아님에도, 나는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가하는 억울함마저 느껴진다. 그들이 느낀 감정의 깊이는 내가 느끼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일까, 나는 이정도의 절망감에 절절매는 정도의 사람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슬럼프라서가 아니라, 나는 ‘나’이기 때문에 이렇게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결국엔 해결불능의 진실임을 깨닫고 어떻게든 초연해져야 하는 것인지, 나 자신을 자조해야 하는 것인지, 무엇이 어떻게 됐든 억지로라도 모든 것들에 노력하며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무책임한 생각들로 나를 위로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그나마 재밌게 할 수 있고 나름의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글쓰기나, 영상이라는 내가 가진 가능성마저 희미해져 버리는 것 같다.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작 내가 이렇게나 힘에 부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서럽다. 언젠가는 잃어버릴 가능성이라는 얕은 짐작을 하면서도 그 가능성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 현재의 내 모습 같아서. 사실 이미 그 가능성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 둘씩 희미해져가는 자신의 가능성들을 지켜보는 일은 달관이 가능한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가능성, 미래가 없는 누군가의 인생을 누가 낙관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삶의 의미조차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미해져가고 있는 가능성들에 체념하고 다른 가능성을 끊임없이 발굴해나가야 하는 것이 옳겠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어 버린 것도 같고, 그 자체로 고된 일이기도 하며, 조금이라도 보였던 가능성에 목매며 이렇게 어떻게든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를 계속하다보면 내가 잡아야 할 가능성인지, 놓아야 할 가능성인지가 지금보다는 좀 더 명확해지겠지.


       

사실 좋은 영화도 많이 봤고, 곁가지들이 풍성한 단상들도 몇몇이 생각나 쓰고 싶었던 글도 꽤나 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진 이유는 그것을 담아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단순히 어떤 것들이 좋았다고 쓰고 싶지는 않았다. 담아내는 가치는 누군가 글과 같을 수 있어도, 진부한 형태, 아무리 복잡해도 뻔한 것, 이미 많은 것, 형식이라 불릴 수 있는 구조를 가진 그런 글들은 쓰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쓰는 글은 조금이라도 그 방식이 달랐으면 좋겠고, 그 방식을 통해 내가 무엇에 대해 쓴 글이 담고 있는 것은 언제나 그 무엇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누구라도 내 글을 읽고 대충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글이었으면 한다. 사실 욕심에 기인한 강박이다.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경험, 어떤 독특한 색채가 나에게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기를 바라는 것뿐이니. 그 결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지루한 과정을 수없이 견딜 수 있는 무한한 인내가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온전한 나 자신의 문제를 제외하고도, 여러 환경들이 나의 슬럼프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데, 최순실로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에 군인으로서 침묵해야 하는 상황이 나를 더욱 무력하게 만든다. 정치적 중립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가 이러한 사태를 마주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음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인가. 최순실 사태가 만들어낸 절망감은 나를 분노케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국에 변하는 것은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게도 하는데, 나를 둘러싼 환경이 무엇을 어찌할 수 있는 치열한 고민의 생략을 정당화해주는 명분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사실을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여기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한몫하고 있다.      



그래서 어떡하자고. 사실 뭐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쓰는 글이다. 슬럼프를 겪으면서, 슬럼프에 대해서 쓰고 있는 글이니 탈고의 탈고를 거듭해도, 결국은 거듭날 수 없는 글이니 아까 말했던 것처럼 완성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무엇이 완성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그래서 아주 무의식적인, 글을 썼다. 나는 모든 세상사에 진리로 통하는 시간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더 지극히 읽고, 지극히 보다가, 지극히 경험하다가, 그런 모든 지극한 것들이 지루해지면 무언가 나올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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