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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Aug 04. 2016

파괴의 역설

<데몰리션(Demolition)>

 모든 절정은 결말의 직전이며, 전환점이다. 어떤 일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사소하거나 혹은 위대한 결정적인 순간들이 필요하고 그러한 과정없이는 새로운 일들과 마주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새로운 어떤 것으로 향하는 계기가 되는 절정은 전환점이라 부르기에도 당연한 무엇이며 우리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며 발전해나가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발전이라는 것은 끝이 없기에 무한히 추구할 수 있는 가치임과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든 얻어질 수 없는 무언가다. 그리고 이 말 또한 누군가가 했을 법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봐선,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어떤 것의 일종임에도 분명해 보인다.


 영화 데몰리션은 ‘절정’으로서 자주 표상되는 ‘죽음’, ‘파괴’등의 설정을 통해 데이비스, 카렌, 크리스라는 인물들이 자신의 감정, 구체적으로‘사랑’의 감정을 인식하고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감정을 인식한다는 말은 그 이전에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므로 그들은 새롭게 마주한 감정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은 너무나도 보편적이며 모든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은 그 감정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혹은 느낀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 어떤 감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함에도 알 수 없는 그 감정에 대한 혼란의 감도는 크리스, 카렌, 데이비스 순으로 높아진다고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데이비스의 혼란과 자기 인식 과정은 굉장히 극적이었다. 또한 서로가 맞물려 각기 다르지만 닮은 고통에서 회복하는 세 인물의 상호작용 역시 인상깊었다. 


내 심장이 고장났나봐...


 그 절정의 순간은 데이비스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데,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스의 아내인 줄리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절정의 초반부 배치를 통해 형식상의 재미를 안겨주기도 하는 이 설정은 기존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아내=‘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후의 남겨진 사람을 다룬다. 데이비스는 병원 대기실에 있는 자판기가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아내의 죽음을 겪고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겪지 않는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는 분명 자신의 몫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건만, 그가 보기에는 자신의 몫마저 타인들이 가져가버린 것만 같다. 하지만 타인들은 데이비스가 상실감에 감정마저 마비된 것이라 느끼는데, 데이비스는 그 인식의 괴리 덕분에 자신의 슬픔을 객관화된 실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자판기가 아닌 감정이 작동하지 않는 자신의 상태를 전달하는 편지를 자판기 회사에 보낸다. 그것이 카렌과 만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나는 심장이 업서... 아플 수가 난 업서....


 우연한 연민으로 인연을 맺게 된 카렌과 데이비스는 서로 닮은 점이 많았는데, 줄리아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데이비스에게 카렌 자신 역시 현재 연인인 ‘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점이 그렇다. 결국 두 사람 다 ‘형식상의 사랑’에 익숙했고 ‘진실된 사랑’에 무감했다. 또 데이비스는 사람의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해체해봐야 한다는 장인어른의 말을 따라 해체 작업에 몰두하고, 카렌 역시 처방받았다고 데이비스를 속인 대마초를 피우며 그들 자신의 공허한 감정을 달랜다. 하지만 그들이 그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절정의 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컴퓨터, 화장실 문, 카푸치노 기계 등 사소한 것들의 파괴로부터 시작된 데이비스의 해체 작업은 파괴에 이르러 자신과 줄리아의 집을 부수기로 마음먹는다. 카렌 또한 더 많은 양의 대마초를 피우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더욱 심화해 나간다. 각자의 파괴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오롯이 마주하길 원하던 그들은 닮은 것 같은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다. 줄리아의 아들 크리스는 그 둘의 인연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는 장치임과 동시에 데이비스와 카렌과 같이 자신의 감정의 날것을 인식하려는 주체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의 사랑이 향하는 곳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그 두 방향 모두인지 혼란스러웠던 크리스는 여장, 게이 클럽 파티 등 자신만의 모험을 감행한다.


 

 데이비스는 줄리아와의 기억이 담긴 집을 부쉈다. 그 파괴에는 카타르시스가 없었다. 감정의 폭발적 분출로 자주 묘사되는 파괴의 행동은 이 영화에서 그저 힘겨웠을 뿐이다. 그렇게 무기력한 파괴로 부숴진 집 안 서랍에서 그는 줄리아가 숨기고 있던 태아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는 그 사진 속 아기의 존재를 이제껏 알지 못했다. 줄리아 장학재단의 출범 기념식에서 그 비밀을 알게 된 그는 이제야 줄리아의 잔상이 계속해서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서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에 무감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만난 줄리아의 행동에 질투를 느꼈건, 분노를 느꼈건, 슬픔을 느꼈건, 그 감정의 동기는 ‘사랑’이었다. 데이비스의 집을 방문했던 카렌의 말처럼 너무 눈부셨던 집, 꿈 같은 집을 파괴한 데이비스는 그 눈부시고 꿈같은 줄리아와의 사랑을 말그대로 눈이 부셔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카렌 역시 그렇다. 크리스 때문에 안정적인 생활이 필요했던 카렌은 ‘칼’에게 사랑을 가장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가 자신만의 모험의 끝에서 누군지 모를 누군가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난 뒤, 자신의 사랑이 향하는 방향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된 것처럼, 그녀도 단지 크리스를 사랑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크리스에게 칼을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크리스를 너무나 사랑한 탓에 칼을 향한 감정에도 그 사랑이 배여있는 것이라 착각했던 것이다. 


 

 결국 데이비스, 카렌, 크리스는 이제까지의 자신을 통째로 허물어버리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결코 이것이 끝은 아니다. 영화의 내용 이상으로 뻗어나가는 생각의 줄기겠지만,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완성형이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지금의 모습, 감정 역시 언젠가는 허물어야 할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데이비스와 카렌의 파괴적 행위는 능동적이었지만 구타를 당한 크리스의 파괴는 수동적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한 가지 모습에 자기 자신을 머물러 있게 할 수 없으며, 머물러 있게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 혹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위한 과정에서 겪는 우연같기도, 필연같기도 한 모든 것들을 단지 어떻게든 겪어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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