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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Aug 04. 2016

'자아'라는 공고한 탑이 무너질 때.

<더 콩그레스(The Congress)>

원하는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


 얼마 전 재밌게 본 영화 <싱 스트리트>의 'Drive it like you stole it'라는 곡에 'You can be anything, you can go anywhere.'라는 가사가 있다. 청춘들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이 가사는 그들에게 희망으로, 기회로 가득 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해주는데, 사실 모든 것이 되고 싶고 모든 곳에 갈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비단 청춘만은 아니다. 모든 인간을 그런 세계를 꿈꾸며 그런 세계를 소망하며 노력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희망적인 메시지에 <더 콩그레스>는 유보적이다. 

유토피아 같기도, 디스토피아 같기도 한 밝으면서도 기괴한 비주얼의 세계.


 <더 콩그레스>안에서 세계는 점차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진다. 영화사 미라마운트는 환각 앰퓰을 개발하고 사람들에게 환각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환각 세계’는 애니메이션으로 표상되는데, 초반에는 현실 세계와 환각 세계의 과도기적 형태를 갖춘 ‘아브라하마’라고 불린다. 환각 세계인 ‘아브라하마’는 신앰퓰의 개발을 통해 그 세를 점점 확장하고 현실 세계를 잠식하기에 이른다. 결국에는 먼저 존재했던 현실 세계에 우위를 점하고 보편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굳어진다. 그 와중에 현실 세계는 기존의 외양만을 간직하고 있으며 황폐화된 과거의 박제로서 겨우 존재하고 있다. 그 세계를 채우는 대부분의 인간 또한 환각 세계의 아바타로서 존재할 뿐이며, 이제 ‘인간’이 했던 일들ㅡ문화의 향유, 혁명, 인간관계의 형성 등ㅡ 대부분까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대신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의 아바타로서 여겨지던 애니메이션 캐릭터(환각 세계의 인간들)들은 원래의 인간이 수행하던 대부분의 역할을 앗아갔다. 결국 현실 세계에 속한 ‘실사 인간’들은 앰퓰을 마시기 위한, 즉 환각 세계를 위한 도구로 기능하면서 아바타로 전락해버리는 역설이 일어난 것이다. 영화는 두 세계가 혼재된 곳에서 끊임없는 가치판단을 요구받는 주인공에게 관객을 투영시키고 이야기를 전개하며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로빈 라이트의 스캐닝 작업. 이것은 구원일까?


 영화의 주인공인 로빈 라이트가 처음으로 환각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 계기는 미라마운트의 스캐닝 제의다. 빌어먹을 컴퓨터 칩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그녀는 매니저의 설득에 결국 스캐닝 제의를 받아들이는데, 이때 매니저가 그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함축한 대화가 오간다. 배우는 스크린 안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자아’를 연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연기를 넘어 그 ‘자아’를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을 때 훌륭한 배우임을 인정받는다. 즉, 자신의 자아를 탈피하고 다른 사람의 자아를 완벽히 내면화해야 하는 필연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피부, 몸매, 사생활 관리 등 부수적인 조건들이 무수히 수반된다. 매니저는 스캐닝 작업 한 번이면 이 모든 것에서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로빈 라이트는 스캐닝 작업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출연할 영화를 선택할 결정권을 빼앗기고,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왕년의 배우라는 타이틀, 금전 등의 현실적인 요건들과 자신이 출연을 원하지 않는 ‘영화 장르’정도에는 제한을 걸 수 있다는 계약 조항에 약간의 위안을 얻으며 제의를 수락한다. 곧바로 진행된 로빈 라이트의 스캐닝 작업은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를 연상시키며 마치 구원 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동안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으라는 매니저의 말에, 그녀는 스캐닝을 통해 진정한 구원을 얻은 듯 눈물을 흘린다. 이때는 작은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영화계를 둘러싼 시스템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이를 통해 로빈 라이트를 포함한 배우들은 자유로워졌고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환각 세계를 채울 캐릭터를 형성하는 탈자아의 첫 과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면 함정일까?


 20년이 흐른 뒤, 로빈 라이트는 미라마운트가 주최하는 미래학 회의에 귀빈으로 초대받는다. 미래학 회의가 열리는 곳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아브라하마’라는 환각 세계다. 아브라하마에서는 사람들이 실사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존재하며 사람들은 그 세계의 구조에 완전히 매료되어있다. 실사가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변하는 이 극적인 변화는 영화를 둘러싼 세계가 주는 낯선 환경을 관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 과도기적 형태의 환각 세계에서 로빈 라이트는 자기도 모르는 새 미라마운트 나가사키의 ‘상징’으로서 역할하고 있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인간의 ‘자아’의 존재론적 가치에 관한 본격적인 의문점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원하는 모든 것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앰퓰에 대해 찬양조 연설을 늘어놓는 미라마운트 나가사키의 수장의 입장에서 보면 앰퓰은 꿈의 성취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인간이 살아있는 목적 자체를 ‘자아실현’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진리로서, 신념으로서 굳어졌다. 하지만 로빈 라이트는 그 연설에 대립각을 세우며 청중들에게 깨어나라고 말한다. 어떤 자아든지 간에 무한한 성취가 가능한 ‘자아의 무한성’은 역설적으로 ‘자아의 소멸’로 수렴하는 것이며 결국 자아의 상실은 삶의 목적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 순간 환각 세계에 저항하는 반란군이 아브라하마 나카사키의 수장 암살에 성공한다. 이어지는 반란군의 저항과 그에 대응하는 아브라하마 체제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 갈림길에서 무엇이 옳은 삶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요구받는다. 

사랑을 나누는 것까지 가능한 완벽한 환각 세계라니!


아브라하마 반란으로 인해 70년의 세월을 냉동인간으로 보내고 깨어난 로빈 라이트를 맞이한 세계는 그녀의 기대와 달랐다. 환각 세계는 과도기를 지나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으며 대부분의 인간들이 환각 세계에 살고 있었다. 자아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경쟁도, 그에 기인하는 폭력과 전쟁도 사라졌으며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의 실현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자신들을 행복한 존재로 여겼다. 결국 로빈 라이트도 환각 세계의 체제를 조금씩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는데, 알약 형태의 신앰퓰을 먹기도 하고, 그 세계 속에서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도 그 환각 세계에 종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결국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환각 세계에 대한 거부감에서 기인한 것인지, 잃어버린 애런을 찾기 위한 감정적 행동인지, 혹은 복합적인 결과의 행동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녀의 행동을 두 세계 중, 어느 쪽도 결정할 수 없는 유보적인 태도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현실 세계로 돌아가 겪는 일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황폐해진 현실 세계에 흔들리는 동공..


 그렇다면 현실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현실 세계에서 ‘육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미 황폐한 상태며 인간들은 모습은 난민과 다름없이 추하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육지’에서 떨어진 ‘하늘’에 현실 세계를 마련했다. ‘육지’는 이미 환각 세계의 아바타로서 존재하는 인간들이 대부분이기에 사실상 환각 세계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환각 세계는 ‘현실 세계’의 인간들의 주된 활동 영역이었던 육지마저도 집어삼킨 것이다. 그렇다고 하늘도 완벽한 현실 세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획일화된 사람들의 복장과 순백색의 배경 등은 원래 현실 세계에 존재하던 다양성들이 희석된 공간임을 보여준다. 하늘 공간은 위치적 특성 덕에 단순히 생각하면 환각 세계의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아니다. 잠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로빈 라이트가 그러했듯 하늘에 떠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지에 있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하늘 공간에 있는 그 누구도 지저분하고 이질적인 모습을 한 로빈 라이트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하늘 공간은 로빈 라이트의 아들 애넌이 연을 날리던 하늘의 연장선이다. 하늘과 비행은 ‘자유’라는 개념과 쉽게 대응하지만 영화 초반 담장 너머로는 연을 날릴 수 없었듯 하늘 역시 제약된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늘에 마련된 현실 세계는 구별되고 독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가상 세계에 밀려나 겨우 존재하는 공간이다. 결정적으로 현실 세계를 ‘추악한 진실’ 일뿐이라고 관조하며 차라리 환각 세계가 낫다고 말하는 애넌의 담당 의사 바커의 대사처럼 현실 세계를 채우는 인간 군상 또한 이 모든 상황에 회의적이다.
  
 그 담당 의사에게 앨런이 불과 얼마 전 환각 세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로빈 라이트는 다시 환각 세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의 삶ㅡ현실 세계에서의 삶을 포함한ㅡ들이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형태로 플래시백 된다. 이는 그녀가 환각 세계를 완전히 수용했음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앨런을 만난다. 그녀가 끊임없이 찾아 헤매던, 삶의 목적이라고도 볼 수 있던 아들 앨런을 드디어 만난 것이다.
 

정답은 나도 모르겠다~ 아몰랑 ㅠㅠ


  <더 콩크레스>라는 영화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을 넘어 모든 ‘것’들까지 될 수 있으며, 모든 곳을 갈 수 있는 것을 넘어 모든 곳을 상상하기만 하면 되는 세계를 창조한 인간의 군상을 보여준다. 이 인간 군상은 일견 비극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 인간이 이제껏 믿어왔던 ‘자아실현’이라는 삶의 목적,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수많은 회의적 견해에 얼떨떨해질 정도다. 하지만 요즘 읽고 있는 책 <사피엔스>와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비극적으로 보이던 모습이 진정한 유토피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모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평등, 자유 등의 개념과 자본주의. 인간이 실재한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모두 가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그것들을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 그것들로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믿고 있는 ‘자아’, 자신들의 ‘자아’에 대해서도 의심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인간은 ‘나’라는 정신적 실체가 존재하고 그 정신적 실체가 곧 자신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아’조차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으로서 실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그것들이 당연시 여겨지는 탈자아의 사회에서 비로소 인간은 유토피아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해체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끔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ㅡ돈, 외모, 경쟁 등ㅡ에게 구애받지 않는 행복한 삶을 상상해본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이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말이다. 일상적으로 모든 것들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삶을 상상할 때도 우리는 ‘자아’만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자아’또한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탐욕을 수반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하다. 탐욕은 반드시 파멸을 동반한다. 또한 실제로 2013년도에 뇌과학 분야에서는 우리가 ‘자아’라고 느끼는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적인 연구결과를 낸 적이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와 같다. 우리의 행동이 실제로 의식의 명령을 받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뇌가 곧바로 이를 의식적인 행동으로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우리의 자아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생긴다. 진보는 두려움을 야기한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상상 속의 미래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겁이 나지만, 두려움을 생각하기 전에 그 진보가 진정한 진보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어쩌면 이제까지 공고했던 ‘자아’의 탑이 무너질 때를 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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