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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Aug 05. 2016

퐁네프의 연인들

자유가 곧 낭만이리니.

어찌 보지 않을 수 있으리!

 
 내무반 사람들이 한창 10cm의 음악 '스토커'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는데, TV로도 뮤직비디오를 틀어서 볼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나도 뮤직비디오를 보게 됐는데 음악도 음악이지만 영상에 더 눈이 갔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영화였다. 그냥 이름만 들어도 낭만적이었다. 파리의 많고 많은 다리 중 한 다리의 이름을 덧붙였을 뿐인데. 그래서 ‘기억에 담아뒀다 나중에 봐야지’ 생각을 했고 이번에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이토록 지저분한 낭만이라니.


 <퐁네프의 연인들>은 부랑자 커플의 사랑이 낭만으로 전환된 영화다.ㅡ애초에 모든 사랑은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랑이 낭만적일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ㅡ 낭만은 일종의 판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낭만은 현실감과 동떨어져 있다, 부랑자라는 캐릭터 특성상 그들에게 낭만은 희미한 존재다. 그들과 가까운 곳은 도시의 어느 변두리에 마련된 자신들만의 장소, 어디서나 주변이고 외딴곳에 위치한 어떤 곳들이다. 공사가 진행 중이라 관리는 엉망이며 어수선한 다리지만 어딘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수식어에 걸맞게 이 영화의 부랑자 커플은 낭만으로 가득하다. 부랑자라는 그들의 특성 중 그나마 낭만과 가까운 것을 고르라면 아마 ‘자유’일 것이다.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낭만으로 가득 찬 장면이었고, 힘에 겨워 아무렇게나 누운 채로 서로의 기괴한 웃음소리를 듣는 장면도ㅡ줄리엣 비노쉬가 이렇게 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놀라긴 했다.ㅡ그저 낭만적이었고 낭만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부랑자들이 불꽃놀이를 즐기고 놀이기구를 즐길까. 혼자라면 그들은 불꽃놀이가 됐든 폭발이 됐든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그런 것들이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있었기에, 그들에게 그 ‘자유’만큼은 충분하기에 그들의 사랑은 낭만이 됐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알렉스 (실제로 줄리엣 비노쉬가 키도 더 크더라.)


부랑자 커플의 사랑이 낭만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의 결정적 이유는 정신병에 가까워 보이는 알렉스의 사랑이다. 몇몇 장면에서 알렉스의 병적인 사랑의 증세를 관찰할 수 있는데 루브르에 간 미셸을 떠난 것으로 착각해 자신을 자해한 장면, 기껏 모아둔 돈을 강에 떨어지게 만든 행동, 그녀를 찾는 포스터를 태우는 것도 모자라 사람까지 살해한ㅡ고의는 아니었겠지만.ㅡ 행동들이 그렇다. 병적인 집착 증세를 보일 만큼 미셸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들의 사랑은 낭만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타이타닉호가 부럽지 않은 낭만이다!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부랑자 커플에게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그들의 관계의 굴곡과 그녀의 시력 상태를 병치시키는 것이 이 영화의 흥미로운 장치 중 하나였다. 애초에 미셸이 부랑자가 된 것은 그녀의 시력 때문이었다.ㅡ줄리앙과의 이별도 한몫했겠지만.ㅡ 왼쪽 눈은 아예 시력을 잃은 듯 항상 밴드를 붙이고 다녔다. 한쪽 눈이 어두워진 덕분에 그녀는 바깥으로 나왔고, 알렉스를 만났다. 알렉스를 만나 사랑하는 동안에는 오른쪽 눈으로라도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눈의 시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그녀는 점점 자신의 사랑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자신을 찾는 아버지의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 소리에,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소리에, 단숨에 알렉스를 떠날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알렉스에게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설상가상으로 알렉스는 과실치사 혐의가 발각되어 징역형에 처해진다. 낭만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사랑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다시 만난다. 미셸이 알렉스를 찾아 면회를 왔다. 시력이 회복된 채, 그것도 두 눈 모두 말이다. 그들은 몇 마디의 다툼 끝에 다시 열렬한 사랑을 약속한다. 파리에는 이제 그들이 나눴던 퐁네프의 다리가 없다. 그래서 출소한 알렉스와 미셸은 또 모든 것을 버리고 둘만의 사랑을 위해 파리를 떠난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이전보다 선명해졌다. 

 파리는 사실 낭만의 도시라고 불리기엔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파리라는 도시에 ‘낭만’이라는 이미지를 병치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레오 까락스의 영화 중 내가 본 것이라곤 <홀리모터스>뿐이지만 그 기괴한 감독인 레오 까락스조차 낭만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파리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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