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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Aug 18. 2016

왜 구태여 살아가는가
1 · 셰임(Shame)

누군가의, 나의 비관적 미래


세 명의 남자를 봤다. 영화 '셰임'의 '브랜든', '비기너스'의 '올리버', '이레셔널 맨'의 '에이버' 그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나와 닮은 점이 있다. 그것은 생의 의지조차 상실한 듯한 무력감이다. 번아웃 증후군에 쓰러졌던 한국사회가 분노사회로 바뀐 지금도 나는 여전히 무력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적어도 조울증 하나 정도는 안고 사는 게 현대인의 미덕이라도 되는 듯이, 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그 불안감의 원인은 너무나 총체적이고 복잡해 해결이 쉽지 않기에 몇몇의 사람들은 순간적 해소의 한 방법으로 분노를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쓰러져있던 사람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그 분노가 서로에게 향하는,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참 아쉽지만. 여하튼, 나 역시도 때때로 순간적인 분노를 느끼지만 그 분노를 지속할 만한 힘이 내게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무력감과 그로 인한 순간적 분노감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 마주하는 것은 결국 무력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느끼는 분노를 표출할 방법이 없다. 자신을 학대해봐야 좋을 게 없고 그럴 용기도 없다. 그저 희미한 희망 정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영화 속 세 남자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브랜든이나 올리버나 에이버도 일단은, 살아간다. 


그런데 누군가 '왜 구태여 살아가는가'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기에 세 남자의 대답을 상상해봤다. 사실 솔직해질 수 있을 만큼 대담하지 못한 나 자신을 위해 그들을 대변인으로 세웠다. 그리고 사실 무력한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나의 내면의 쌓여있는 감정을 누군가 위로해줬으면 하지만 누군가 내 그것에 대해 아는 순간 무언가 들킨 기분이 들어 찝찝하다. 나에겐 무력감이 그렇다. 어쨌든 그 세 명의 대답은 비관적이거나 낙관적이거나 엉뚱하다. 그중에서 나는 올리버와 제일 비슷한 말을 할 것 같고, 세 명의 삶 중에선 그의 삶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인다. 어쨌든 진짜로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그리고 할 수 있을까.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원 미상의 이 무력감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여지껏 경험한 모든 것들이 뭉쳐져 굳어진 무엇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뿐이다. 이 무력감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영화 데몰리션의 데이빗처럼 그것을 산산조각 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디 쉬운가. 그 무력감과 대면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약 용기 내어 그 물음에 대해 답을 한다 해도 상대방이 과연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것에 대해 물어줄 만한 누군가가 있다면 이만큼 무력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문제다. 그렇다고 자꾸 나 자신의 내면만 파고들다간 그 구덩이가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미래는 과연 어떨까.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비관적인 현재보다 더 비관적일 것인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지금보다는 낙관적일 것인가, 혹은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세 영화 속에 담긴 세 명의 남자들을 보면서 내 미래를 전망해봤다. 아니, 흘깃 훔쳐봤다. 비관적으로, 낙관적으로, 엉뚱하게. 그리고 사실 모든 것이 즐겁고 힘이 넘칠 때도 때때로 있으니, 리뷰를 쓰면서 우울해지지는 않기로 했다. 



제작자와 패스벤더에게 경외를!


셰임을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장면 때문이다. 이리도 아름답게 무력해 보이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이 장면은 브랜든이 느끼는 무력감의 위압을 단 몇 초의 정지 시퀀스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브랜든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극한으로 간 모든 것들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비어있는 눈빛은 자신 내면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음을 알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해 공허함을 택한 역설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층위가 복잡한 내면은 온전한 재현이 불가능하기에. 표현의 시도조차 왜곡이 되는 그것은 형용할 수 없기에 아름답다. 하지만 영화 '셰임'은 브랜든의 눈을 통해, 장면의 구성을 통해, 내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무력감으로 표상되는 한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 보였다. 세밀하게 표현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한 표현 방식은 작중 브랜든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해서 그의 생기 없는 모습조차 아름답게 만들어 버린다. 이 장면을 본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한 인간의 내면을 완벽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브랜든의 일과는 간결하다. 출근, 퇴근, 섹스. 그는 섹스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콜걸을 부르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눈이 마주친 여자나 술집에서 마주친 여자와의 하룻밤도 상관없다. 상대가 없다면 혼자서라도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집은 야한 잡지로, 노트북은 야한 동영상으로 가득하다. 그의 성생활은 갈수록 추악해지는데 웹캠 섹스, 난교 심지어는 동성 간 섹스에까지 발을 담근다. (동성 간의 섹스가 가장 추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껏 이성애자로 살아온 브랜든 자신이 단순한 성욕 해소를 위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는 그의 행위가 추악하다는 뜻이다.) 그의 비정상적 성생활의 근원은 바로 무력감이다. 그 무력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본능적 충동에 매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적인 성욕 해소에 불과하다. 어쩌면 성욕 해소라는 것에도 무감해져 그 해소의 행위조차 단지 무력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의무적인 습관처럼 굳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브랜든은 무력감 해소를 위해 달리기와 같은 건전한 방식도 시도해보지만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클럽이었다. 그래서 그의 섹스는 격렬하지만 충족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느끼는 무한한 무력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결핍이다. 사랑의 결핍. 받는 것, 주는 것 상관없이 모든 사랑에 대해 불구자다. 회사 여직원과의 저녁 식사에서 그는 누군가와 관계를 가장 오래 지속한 것은 단 몇 개월이며, 진지한 관계 자체에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그나마의 위안이 되는 것은 회사 여직원과의 저녁 약속에 응했다는 사실로, 아직은 그가 진정한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희망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와의 성관계에서 그는 처음으로 섹스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랑이 담긴 섹스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와의 진정한 관계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기에 매번 반복되는 실패의 경험은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그에게 무력감만을 일깨워준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집에 있는 모든 성인 잡지와 노트북을 버리는 장면에 담긴 것처럼 수치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절절한 자괴감이다. 





브랜든이 느끼는 자괴감은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종의 희망이다. 브랜든의 동생 씨시는 그에게 자괴감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브랜든은 사랑의 결핍으로 무력감을 느끼는 인간이지만 씨시는 조금은 더 작은 범위의 사랑인 가족애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브랜든은 씨시에게 냉정하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군다. 집에 들어온 첫날부터 진지하지 않은 관계(마이크)에 매달리며 울면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씨시가 탐탁지 않다. 동생을 위해 기껏 그녀가 노래하는 라운지 바에 갔더니 같이 간 자신의 상사와 만난 지 20여 분만에 잠자리를 가진다. 그리고 씨시는 그가 자위하고 있는 화장실에 제멋대로 들어오더니 성인 웹캠이 켜진 노트북을 보고 있다. 동생에게 수치를 느낀 브랜든은 갑자기 씨시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증오를 느꼈던 대상은 씨시의 모습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이며, 씨시에게 느낀 증오는 그녀를 향한 사랑이다. 그의 비정상적 성생활을 생각하면, 유부남인 자신의 상사와의 잠자리를 들어 씨시를 모욕하는 브랜든의 말은 매우 모순적이다.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씨시의 말에도 결혼반지를 보지 못했냐며 몰아 부친다. 누군가의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눈여겨보는 것은 브랜든 자신의 습관이라는 점에서 씨시가 브랜든 자신의 투영이라는 점이 더욱 확실해진다. 씨시에게 던져버린 지독스러운 말들은 브랜든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들이다.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동생을 보며 비관에 휩싸여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들이다. 자신도 위로가 필요하듯 동생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씨씨를 모욕한 브랜든이 느낀 절망감은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씨시와 싸우다 지쳐버린 브랜든은 동생을 홀로 남겨두고 집을 떠나 방황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그는 섹스를 선택한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그는 동생이 남긴 음성메시지를 듣고 불안감에 휩싸인다. 역시나 집에 달려가 보니 씨시가 손목을 긋고 피를 흘리며 화장실에 널브러져 있다. 그제야 브랜든은 동생에 대한 감정 중 사랑이 제일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브랜든의 무력감이 극복되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브랜든의 무력감은 아마 그 이상의 것일 테고, 씨시에게 향하는 사랑은 이성에게 향하는 그것과는 결이 다르기에 충분치 않을 것이다. 브랜든과 씨시는 남매라는 점에서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랑임에는 분명하지만 서로 다른 두 남녀가 합일되어 느낄 수 있는 극적인 일체감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씨시의 손목에는 상처가 꽤 많은 것으로 보아 이전에도 여러 번 자살시도를 꾀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씨시의 이번 자살 시도가 브랜든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인 지하철에서 브랜든은 영화에서 맨 처음 마주친 그 여자와 다시 마주친다. 그녀와 마주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그때보다 화장도 짙고 훨씬 매력적인 옷차림을 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에게 눈빛을 보낸다. 그녀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고, 브랜든은 그 반지를 주시한다. 한마디로 그녀는 브랜든의 성적 욕망이 시각화된 대상이다. 그 욕망은 좀 더 자극적으로, 매혹적으로 변했다. 당장에 무력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브랜든은 그녀를 따라갈 것이다. 한층 수위가 높아진 자극에 그는 당해낼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지금을 버텨야 미래의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 그래서 그녀와의 마주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그는 점점 더 매혹적으로 변해가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되는 악순환에 빠져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상상하는 비관적 삶이다. 끝끝내 바라는 것, 브랜든처럼 진정한 관계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의 희망을 가지고 꾸역꾸역 버텨내는 것. 그렇게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점점 커지는 절망감을 느끼며 그 절망감에 익숙해지는 것. 삶의 표면에서 드러낼 수 없는 그러한 감정들을 혼자만의 공간에서 키워나가는 것은 나를 집어삼킬 숙주를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며 사는 삶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브랜든처럼 가족이 있다는 것. 좀 더 나은 점은 좀 더 많은 가족이 있다는 것이지 않을까. 내가 구태여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주는 가족들. 사랑을 받는 것과 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겨우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구태여 살아가게 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없으면 최소한의 삶의 원동력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존재들조차 없는 누군가들은 무엇을 붙잡고 살까.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그 희미한 희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삶은 너무 위태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항상 아찔한 삶을 살아가야 할 테다. 그들은 위로할 수는 없지만, 이 글에 그들과 같은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사실에 누군가가 그나마의 안도를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도 더불어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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