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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Sep 12. 2016

최악의 하루

은희는 '최악의 하루'의 주인공이 아니다.


은희는 영화 '최악의 하루'의 주인공이 아니라 료헤이가 쓰고 있는 새로운 소설의 주인공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내가 본 바로는 그랬다. 왜 그렇게 느꼈는 지에 대해 주절대보려고 한다. 그래서 아마 이야기의 순서가 영화와는 다르게 조금 뒤죽박죽 될 것 같다.


서촌은 역시 구석구석이 이쁘다.


료헤이는 자신의 책의 출판기념회를 가지러 한국에 들어왔다. 그것도 출판한 지 6개월 만에. 그 출판기념회는 조촐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아마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티켓도 자비로 끊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길만큼 소박하지도 못한 정도였다. 아무것도 하지않은 것에 가까운 그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그는 잡지사에서 왔다는 여기자와 카페로 자리를 옮긴다. 근데 이 기자가 참으로 이상하다.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기자로서 자기소개를 하는 장면도 없고 으레 청하는 악수도 없다. 자신이 어디 소속 기자인지, 자신의 이름은 무엇인지도 얘기하지 않는다. 료헤이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그와의 만남에서 큰 감흥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또, 잡지 기자는 응당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여기자의 모습은 너무 세련된 것이 현실감이 없다. 한 가지 현실감있는 부분이라면 기자답게 요즘 핫한 루프탑 카페에 료헤이를 데려갔다는 것 정도? 그리고 건네는 질문들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만큼 어색하다. 잡지에 기사를 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질문같았다. 그 질문까지 이해한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메모장을 펼쳐놓았을 뿐 료헤이의 대답을 전혀 옮겨 적지 않는다. 녹음기라도 있나 찾아봤는데 그런 것도 아니다. 애초에 참석한 사람이 지나가는 아주머니 2명인 출판기념회에 잡지사가 취재를 나왔다는 것도 이상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갑자기 사라진다.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봤을 때는 굉장히 쌩뚱맞았다. 이건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설정인가, 재밌게 잘 보고 있었는데 흐름이 뚝 끊긴다고 해야할까, 사실 아무 생각없이 보려고 선택한 영환데 그때부터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기자가 했던 질문들을 돌이켜봤다. 료헤이는 출판기념회에 우연히 참석한 두 분의 아주머니 앞에서 자신의 작품에 담은 생각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이때 이야기는 여기자의 질문에서 물음표만 빠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사람의 감정, 욕망이 연애라는 관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맥락이었다)이었다. 여기자도 료헤이의 작품을 읽으면 남과 여라는 단순한 관계안에서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리곤 갑자기 항변하듯 묻는다. 주인공들을 왜 그 관계안에 가둬두고 꺼내주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봐선 단순히 그의 소설에 몰입한 것 이상의 무엇을 느낀 듯하다. 그것은 원망에 가까웠다. 그녀는 억울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료헤이가 썼던 소설 속 주인공들 중 한 명이다. 료헤이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 현실로 튀어나와 갑자기 말을 건 것이다.


그녀가 사라지고 혼자 남겨진 순간, 그는 분명히 어떤 고민을 했을 것이다. 출판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기록이라는 말이 무색한, 판매부수가 100권 조금 넘는 수를 기록했다는 어이없는 소식을 전해준 출판사 대표와의 대화가 떠올랐을 것이다. 황망했던 출판기념회의 씁쓸함도 아직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고민은 자신의 책이 왜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닐까. 판매부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료헤이는 누군가에게 읽히길 하는 마음에 책을 썼다. 판매부수는 그 바램이 실현됐는 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다. 그렇다면 자신의 책에 뿌려진 기피제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될 것이다. 영화는 그대로 장면 전환이 되지만 료헤이는 그 순간 답을 내렸다. 그 답은 은희가 보낸 최악의 하루 막바지에서 드러난다.



이제 은희의 하루를 돌아보자. 은희가 최악의 하루를 겪게된 것은 모든 연애가 실패한 탓이다. 어떻게 실패하게 됐냐면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두 남자가 같은 장소에서 마주쳤다. 그냥 마주 스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이에 두고 남자 두 명이 마주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양다리는 평범한 양다리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두 남자를 대할 때 모습이 달랐다. 권율(극 중 현오) 앞에서는 냉소적이고 털털한 모습으로, 유부남 앞에서는 여리고 여린 모습으로. 외투 하나 차이지만 둘을 만날 때 은희의 옷차림 마저 느낌이 너무 다르다. 그녀가 연기까지 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을 구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두 사람 모두에게서 사랑받기 위함이다. 하지만 권율은 아마 유경이라는 여자와 바람을 핀 전적이 있는 것 같고, 유부남에게 자신은 세컨드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연기를 해보지만, 그리고 그 연기는 탁월했지만, 결국은 그녀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 은희가 안타깝지만 그게 하나님 탓이든 세상 탓이든 본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다. 연기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 그것부터 잘못됐다. 사실 남자 캐릭터들도 그 오만에 빠져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연기를 한다. 은희밖에 없는 척, 그녀를 곁에 두려고 한다. 하지만 절대 곁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은희와 달리 그들의 연기는 티가 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은희에게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닌 단순한 욕구였다. 물론 은희도 그들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행해진 것은 은희 혼자였다. 사랑을 받지도, 줄 수도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혼자 남산 산책로에 남겨졌다.


그렇다면 이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은희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는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은희의 남자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정도만이 다를 것이다. 근데 왜 그렇게 살아갈까?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생각의 근원에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관계에 대한 회의가 담겨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받아주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 사람은 누구나 관계를 필요로 하지만, 사람을 매개로 삼는 관계에서 그 불신을 마음에 두고는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 가식과 거짓으로 무장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껍데기뿐인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안도감뿐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다른 사람 역시 그런 방식으로 나를 대할 것을 생각하니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진심을 다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방어기제가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관계에 대한 회의감을 만든다.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인 인생에서 모든 관계가 불신과 회의로 가득차있다면 그 인생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최악의 하루가 아니라, 하루빨리 마무리하고 싶을 최악의 인생이다.


료헤이가 말했듯 사랑이 목적이 되는 연애라는 관계에서 우리들의 감정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관계가 은희와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면, 우리가 얼마나 비겁해지고 비참해지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료헤이의 소설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새드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게 보니 은희의 하루는 그의 소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은희의 하루역시 그렇게 비참하게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자가 사라졌던 그 쌩뚱맞은 순간처럼 갑자기 해피엔딩이 짐작되는 분위기가 영화를 감싼다. 그리고 료헤이는 은희를 주인공으로 해피엔딩의 스토리를 떠올렸다고 한다. 갑자기 전능한 누군가가 모든 것을 뒤엎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은희나, 여기자나 모두 료헤이의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은희는 여기자처럼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생각해보니 료헤이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 영화의 초입역시 소설의 첫머리같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마지막 의문이 남았다. 료헤이가 별안간 자신의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그 어이없는 출판기념회 덕분이다. 자신의 소설을 읽고 누군가 여기자와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불행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 같다면, 그 이야기는 외면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의 소설 속에서 정리되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감정들이 투명하게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춤을 춘다. 조금 더 진실해진 그녀는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래서 료헤이는 무작정 해피엔딩을 계획한다. 사실 료헤이도 은희와 다르지 않다. 그는 일본에서 날아오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비참한 하루를 맞았다. 결국 이 해피엔딩을 계획한 것은 영화의 감독이다. 료헤이는 그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을 뿐이라고 했지만, 작품은 작가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료헤이와 은희는 감독의 반영이다. 그래서 료헤이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 은희를 찾아가게 만든다. 은희가 행복했으면 해서, 마찬가지로 료헤이도. 그리고 감독 자신도. 그래서 갑자기 그들은 행복해진다. 덩달아 관객도 행복해졌다. 우리 모두가 최악의 하루 감독이 만들어낸 주인공과 같이 어설픈 관계 속에서 허우적대며 행복하지 않다고 소리치고 있으니까. 엉성한 마무리라든지, 개연성이 없다든지 하는 것들은 중요하지가 않다. 우리는 행복해야 하니까.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냐에 대한 고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 맥락따위가 없는 해피엔딩이 만들어졌다. 갑자기 눈이 흩날리는 겨울로 계절이 바뀌어도 상관이 없다. 그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있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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