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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Sep 19. 2016

아마드푸르는 무사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토록 유명한 이름을 알게된 건 7월 4일, 고작 2달 전이다. 내가 팔로우하는 몇몇 영화인들의 SNS계정에 같은 글들이 올라왔다. 그를 추모하는 글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많은 이들의 추모를 받을까. 씨네 21에 올라온 글을 클릭했다. 모든 종류의 스포일러를 강박적으로 거부하는 성향이 있는 터라 글은 대충 흘겼다. 그렇게 읽었어도 키아로스타미에 대한 필자의 진한 애정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읽은 뒤에는 몇명이 됐든, '연고없는 누군가의 열렬한 추모를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의 영화라면'하는 생각에 궁금해졌다. 또 그가 만든 영화들의 제목에는 어떤 한 순간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단순한 찰나는 아니었다. 사소히 여겨지는 일상의 것들로 깨달은 통찰이 담겨있는 어떤 총체적인 순간.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기로 했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Zendegi Edame Darad)를 봤다. 왜 삶은 계속되는 것일까 하고. 왜 계속되어야 할까 하고.



영화는 지진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다. 구호단이 도착했지만 여전히 외부의 도움이 절실한 상태며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이 많은만큼 피해가 심각한 강진이었다. 여담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경주에서 꽤나 큰 지진을 겪은 터라 자칫하면 내가 겪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영화가 영화가 아니었고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저 스크린에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공감하며 수전 손택의 책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은 우리 모두 너무 쉽게 타인의 고통에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 그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불행해보이는 사진과 현장을 담은 글 몇 개로 그들이 느끼고 있을 감정을 재단한다. 가장 싸구려스러운 감정이다. 사실 그들은 사진과 글같은 기록에 담긴 찰나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그저 보이는 대로 판단하기에 그렇다. 그런 동정과 연민에서 나온 눈물은 타인의 고통을 인지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의미한다. 타인의 불행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기에 그 눈물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우리는 그렇게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해버린다. 얼마나 힘들까, 희망이라곤 없는 상황에서 무력할 뿐이겠지하며 말이다. 


이 영화에는 그런 뻔한 시선이 담겨있지 않았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주인공과 그의 아들 푸야가 '내 친구의 집은 누구인가'에 출연한 아마드푸르를 찾아 '코게'라는 지역으로 향하는 내용이었다. 코게는 지진 피해가 심각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어떤 이유로 아이를 찾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저 그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며, 그 아이에 대해 물으며 코게로 향할 뿐이다. 


주인공이 두 번째로 만난 할머니. 근심으로 가득찼지만 좌절하진 않았다.


주인공이 아마드푸르가 사는 코게로 향하는 길에 처음 만난 사람은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다. 그 남자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무력감이다. 두 번째로 만난 할머니는 코게로 갈 수 있는 길을 묻는 그의 물음에 길이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친척 16명이 건물에 깔려 죽었다고,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폐허가 된 집뿐이라며 한탄한다. 무엇을 탓할 수도 없는 재난 앞에서 마찬가지로 무력한 누군가의 모습이다. 안쓰러운 할머니를 뒤로하고 그는 다시 코게로 향한다. 그런 와중에 만난 사람들 모두가 그에게 멈추라 말한다. 길이 너무 망가졌다고, 그가 타고 있는 차로는 갈 수가 없다고. 그럼에도 그는 차를 멈추지 않는다. 분연한 주인공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조금씩 희망이 보인다. 꿋꿋이 나간 길에서 마주한 사람들이 이제는 조금은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준다. 차로는 갈 수 없지만 걸어서는 갈 수 있다고. 일단 앞으로 향하기만 했던 방향성도 점차 뚜렷해진다. 막다른 골목이 아닌 갈림길이 나오고 점점 코게라는 목적지에 가까워진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떤 확신이 그를 멈추지 않고 달리게 했을까. 


지진 와중에도 결혼식을 치른 청년. 얼마전 이탈리아 지진에서도 결혼식을 올린 커플이 있었다.


막막함이 조금씩 풀려가는 와중에 주인공을 알고 있는 할아버지까지 만났다. 할아버지는 지진으로 재산을 몽땅 날렸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이 없으니 신의 가호 덕분이라고 말한다. 정반대의 이야기도 한다. 자신의 집만 안전했던 것은 사실 하느님덕이 아니라고. 늑대가 양떼를 해치듯 무작위로 주어진 불행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무리 고민해본들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까.차를 타고 가면서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탓인지 푸야역시 왜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쳤는지, 자신에게는 왜 닥치지 않았는지에 대해 고민한 듯하다. 푸야는 그 고민의 답을 아버지와 물을 마시기 위해 들린 마을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에게 들려준다. 지진으로 딸이 죽은 그녀에게 푸야는 아브라함의 아들에게 그랬듯 하느님은 절대로 아이들을 해칠 분이 아니라며 늑대와 양떼 이야기를 한다. 또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더 열심히 살지 않겠냐며, 그것을 생각하면 죽음덕에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우리가 생의 의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푸야의 아버지가 만난 또다른 사람은 지진으로 난리통인 곳에서 결혼식을 치른 남자였다. '거의' 65명이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죽은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는 와중에 그는 결혼식을 치뤘다. 그저 살아있는 지금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언제든 지진이 자신에게 찾아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건다.


이제는 거의 모든게 확실해졌다. 찾고 있던 아마드푸르는 아니지만 같은 영화에 출연한 파르베네를 길가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아이는 아마드푸르의 소식을 알진 못했지만 코게로 가는 길이 지금 막 뚫렸다는 사실을 전해줬다. 이제 코게에 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는 명확해졌다. 그렇게 파르베네를 데려다 준 곳에서 두 명의 여자아이들을 만났다. 그 아이들은 지진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설거지를 하며 꿋꿋이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축구를 보겠다고 마을에 남으려고 하는 푸야를 돌봐주겠다며 걱정하는 그를 안심시키기까지 한다. 그렇게 아들 푸야를 맡기고 코게로 향하는 길에 그는 축구를 보기 위해 안테나를 설치하고 있는 청년을 만난다. 청년은 멋쩍은 미소를 머금고 여동생과 조카를 잃었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냐며, 신의 뜻이 아니겠냐며. 그리고 그 청년은 아마드푸르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방금 기름통을 짊어지고 코게로 가는 것을 봤다고, 서두르면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안도를 느낀 그는 청년이 알려준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몰고 간다. 그 길에서도 아마드푸르의 또래인 두 명의 아이를 만난다. 주반으로 향하고 있던 그 아이들은 모기 덕분에 지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커브 오르막길 몇개만 돌면 코게다. 영화는 그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주인공의 차를 익스트림 롱 샷으로 보여주며 끝이 난다. 


결국 주인공도 차창밖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코게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말에도 그저 앞으로 향한다. 코게에 가야만 하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으니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는 코게라는 목표에 근접했다. 이 영화만 보면 어떻게 됐을 지는 모르겠지만 목표에 근접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다. 하지만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로 그 길을 지나며 만난 모두가 불행 앞에서 초연했으리라 믿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감독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영화라는 형식을 빌려, 배우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경이를 느끼게 해 준 삶의 태도를 가진 이들을 골라냈을 것이다. 자신이 목도한 경이로움을 나누기 위해, 사실 인간이라는 우리는 어떠한 삶의 추락도 견뎌낼 수 있는 경이로운 존재라고. 그러니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자고 말이다. 


그저 달리다 보면 우리가 설정한 목표에 근접해있을 지도 모른다.

사실 그럼에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경이로움이다. 영화에서처럼 지진으로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소중한 사람은 처참히 건물에 깔려버렸다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다.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생의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상상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무너졌는데, 심지어 되돌릴 수조차 없는데. 하지만 감독은 의심하는 나에게 영화로 말한다. 그들을 보라고. 그들이 얼마나 꿋꿋하게 살고 있는지. 처연함조차 없는 태연함으로 삶의 불행을 받아들였다고. 심지어 그 상황에서도 삶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지진으로 무너진 것들을 등지고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냐고 말하는 그들을 보라고 한다. 상상해보라. 막막한 상황에서 묵묵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 지진이 아닐 뿐 한국 사회도 온갖 것들에 매몰당한 상태다. 정부의 무능, 부정부패, 무력한 국민, 그 모든 것들에 우선하는 물질만능주의. 매몰된 한국 사회 속에서 나는 무력한 청춘이다.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거기서 그친다. 때때로 분노하기도 하지만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아니 똘똘 뭉쳐봐도 결국은 소용없다는 무력감이 그 화를 덮는다. 그 무력감이 분노를 더 치밀어 오르게 할 때도 있지만 결국엔 더 큰 무력감에 진화된다. 영화 '터널'에서 희화화된 한국 사회의 불합리함은 풍자가 아니었다. 그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현실에 대한 허탈한 조소였다. 무력한 청춘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렇게 불리는 모든 청춘들은 전혀 무력하지 않다. 나를 포함한 그들이 무력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에 닿을 수 없어 무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무력감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삶을 내팽겨치는 것도 아니다. 부던히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사실 이제는 청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세대들이 직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지 않을까. 무력감과 노력의 무한순환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대로라면 언제가는 지쳐버릴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준 놀라운 삶의 태도를 배워야 하는 걸까? 모든 불행에도 초연하게, 그저 섭리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럴 수만 있다면야 헬조선과 같은 담론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져도 조금만 노력한다면 영화 속에 그려진 이란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한국이다. 그런 환경을 가지고서도 우리는 왜 주어진 삶을 묵묵히 받아들 수가 없는 것일까. 실제로는 이란도 빈부격차가 꽤나 큰 것으로 알지만 영화 속에 그려진 이란은 절대적 빈곤에 가까운 모습이다. 모두가 똑같이 가난한 상황에서는 그런 불행이 닥쳤을 때 좀 더 초연히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상대적 빈곤이 극심하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불행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의 불행은 구조적인 문제들이 주요한 원인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이란에 닥친 불행은 자연재해다. 어찌할 수 있음과 어찌할 수 없음의 차이다. 어찌할 수 없는 일에는 초연하기 쉽다. 또한 한국의 불행은 일부계층에 집중되며 제로섬 게임마냥 일부계층의 행복은 배가 된다. 그러나 지진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니 그 엄청난 불행 앞에서도 그저 묵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땅을 친들 죽은 이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의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 영화는 한국 사회가 아닌 보편적인 삶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연재난이라는 초월적 불행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그들과 같은 존재인 우리가 겨우 인간이 만들어낸 불행 앞에서 낙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주인공이 모는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하나같이 지진에 무너진 모습이었듯 삶이란 원래 지리멸렬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미지근한 탄산음료같은 삶을 부던히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끝까지 아마드푸르를 좇아 코게로 향했던 주인공처럼 살아가다 보면 갓 태어난 생명에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찰나가 찾아오듯 감격적인 몇몇의 순간들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인생은 그리 퍽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우리가 무력감을 안은 채로도 이제껏 그렇게 열렬하게 살아온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걷는다. 아직까지도 그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 덕분에 우리는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감독의 다른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보면 이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다. 아마드푸르는 무사했다. 끝내 모든 것이 잘 끝났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나 감사한 삶인가. 

*
'지나고 나면 다 괜찮다'라는 말은 진부한 만큼 진리에 가깝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으로 불행을 흘려 보낸다. 사실 얼마 전에 내가 평생을 고민하던 불행을 흘려 보냈다. 적은 나이만큼 짧은 평생이지만, 나에게는 평생이기에 내가 느낀 시간들 중 가장 긴 시간이었다. 그냥 견뎌내다 보니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불행이었다. 그러고 나니, 이 영화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리뷰를 썼을 때까지만 해도 의심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감독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는 불행과 마주하며 살아갈 테지만 어떤 불행이든 결국엔 우리를 놓아줄 것이다. 길이 없는 줄만 알았던 코게로의 행로가 점점 명확해질 수록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삶의 불행을 대하는 태도 역시 점점 초연해지듯. 아마드푸르를 찾는 것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저 묵묵히 가면 된다. 어떤 의심과 회의도 걷어내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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