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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May 03. 2017

‘할 수 없음’의 상태에서 도달하는
궁극적인 비관

<그늘 속의 나무들은 목이 잘렸다>


‘할 수 없음’의 상태, 슬럼프라는 쉬운 단어를 두고 굳이 낯선 방식으로 표현한 이유는 (겨우 평범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나의 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슬럼프는 인간의 일시적인 무력 상태를 이르는 것으로, 내가 겪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능력에 비추어 봤을 때, 나는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이미 오래 전에 파악된 것들을 반복하는 것에 가깝고, 아무리 좋게 치더라도 기존의 것들에 대한 변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 나는 본래 무능한 상태에 가까운 인간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만성적이며 영속적인 슬럼프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내가 사소한 단어 하나에 이토록 엄중한 검증을 거치는 이유는(이전 글에서 ‘존경’에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보면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불신, 혹은 겸손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과신에서 나온 행위일 수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사소한 것, 즉 비교적 파악이 쉬운 것을(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쓸데없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무능을 극복하려는 행동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쉬운 것을 어렵게 만들어, 자신이 무언가 대단히 까다로운 통찰에 성공했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엄밀성이 필요하지 않은 사소한 단어가 가진 의미에 연연하는 것은, 낮은 수준의 능력을 가진 인간이 매달릴 수 있는 것이 또, 얼마나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 재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의 전환인, 나의 슬럼프는, 그 차이가 미미해 보여도 나와 같은 부류에게는 보통 말하는 슬럼프 상태와 다르지 않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뉴턴이 등장해 그리스인들의 관점(변하지 않는 이데아, 영원성, 불변성을 기초로 하는 플라톤식 사고)에서 엄청난 오류를 교정하고 반격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거의 2000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뉴턴은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움직이는 물체가 아니라 정지하는 물체라는 것을 파악했다. 즉 정지가 아니라 운동이 모든 물체의 자연적인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물체는 자기 운동을 억제할 어떤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본연의 운동을 계속 진행한다.

                                                                                ㅡ『과학한다는 것』, 에른스트 페터 피셔.



인간의 본질을 논하는 것은 나의 능력에 당치 않은 일이겠지만, 모든 인간은 ‘운동성’을 그 본질로 가진다. 정지 상태의 인간은 시체밖에 없다. 그러니 인간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정지시키고 억제하는 슬럼프 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할 수 없음’의 상태,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와 극히 모순되는 욕구다. 이런 모순이 어떻게 성립하는가에 관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설명이 가능하면 모순이 아니다) 이러한 모순이, 인간에게는 수도 없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모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는 있다. (가끔은 모순 덕에 생의 의지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그나마 친숙한) ‘쓰는’ 행위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볼 수 있겠다. 슬럼프 상태에서는 본질적으로 ‘쓸 수 없다’. 하지만 이 정지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이든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는데, 이러한 욕구는 단순한 일기나 일상적인 기록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즉, 슬럼프 상태는 무언가 의미 있는, 가치 있는 행위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행위를 촉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전자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물음에 대한 답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단, ‘가치’와 ‘의미’라는 추상적 대상을 명확히 한정짓는 구체적인 설명,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다. (인식에 따라 대상이 변한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개념에서) 이 추상적 대상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변적인 개념이라는 결론은 합리적이다. 부연설명을 덧붙이면, 개인의 인식 능력을 통해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정의 내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경우,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가치’도 있다는 점에서, ‘가치’ 파악의 과정이 오로지 개인의 인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인식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전자의 질문에도 자동적으로 답을 한 셈이 된다. 자신에게 가치 있는 행위를 촉발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가치 있는 행위는 가치를 얻기 위한 동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지금 쓰는 글이 그렇다. 하지만 슬럼프 상태에서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자신의 기준을 충족하는 어떤 가치 있는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에 바로 슬럼프의 본질이 있다. 



결국 슬럼프를 극복하고자 하는 행위 자체가 모순이라는 점에서 드는 한 가지 의문은, 우리가 슬럼프의 극복을 욕구하지만, 그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의미 있는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헛발질 같은 노력에 힘을 쏟아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 중 하나가 운동성에 있다고 해도, 그 속도의 그래프는 일정할 수도, 높아지는 방향으로만 증가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수면이 필요한 것처럼(수면 역시 완전한 정지 상태는 아니지만) 슬럼프는 인간 삶의 균형을 위한 기본적인 생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제대로 역할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슬럼프를 겪는다고 해서 갑갑해할 것이 아니라 쉬어야 하는 상태임을 받아들이고, 회복될 때까지 휴식하는 것도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이 슬럼프 상태에서 발버둥치는 것보다 더 나은 경우가 많다. 



허나 슬럼프가 본질적인 인간 생리라는 사실을 자연히 받아들이는 것도 휴식이 게으름이 된 세계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나의 경우 이 슬럼프 상태가 만성적이라는데 있다. 자신의 능력에 관한 끊임없는 희망과 회의가 수시로 교차하는 나에게, 슬럼프는 너무나 빈번히 찾아온다. 스스로에게 온전히 희망을 가질 수도 없고, 회의를 느낄 수도 없는 이 답보 상태에서, 슬럼프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을 가중시킬 뿐이다. 반대로 만성적인 만큼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나는 한 가지가 두렵다. 이 슬럼프가 단순한 일시적 무력 상태에서 벗어나, 삶 전체에 대한 슬럼프로 확장될까봐 두렵다. (그렇게 된다면 슬럼프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완전히 무능한 인간으로 전락시켜 결국 더 이상 생의 의지를 욕구하지 않는 상태는 이를까봐 두렵다. 그것이 나의 미미한 슬럼프가 촉발한 (논리적 합리성이 심하게 결여된 비약적이고 감정적인 결론이지만, 허나 통찰에 가까운 직관이라 여겨지는) 나의 삶의 궁극적인 비관이며, 아직까지는 그것이 두렵다는 사실을 다행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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