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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May 19. 2017

토성의 영향 아래

under the sign of saturn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b7ONKlmzwxQ



벤야민은 스스로를 우울한 사람으로 생각했고, 

현대 심리학에서 붙이는 명칭을 경멸하여 전통적인 점성술적 개념을 끌어온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우울한 열정(Under The Sign Of Saturn)』, 수전 손택.



부정하면서도 당연시 여겼던 사실. 나 역시 우울한 사람이다. 극복할 수 없어 부정했다. 한 구석에 묻어놓고 괜찮은 척 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게 묻어야 했고, 묻어도 묻어도 끝이 없었다. 끝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너무 깊게 묻은 탓일까. 당연시 여겼던 사실을 파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래도 스스로 매몰시킨 것들과 마주하면 적어도 모든 것이 선명해질 줄 알았는데, 파내고 보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차라리 외면했던 때가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우울한 사람일뿐, 우울증은 아니다. 


벤야민처럼 병리학적 용어를 거부하려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애매한 인간으로서 우울감마저 극에 달하지 않았다고 느낄 뿐. 겨우 견디기 힘든 정도의 우울감. 내가 겪는 우울감은 딱 그 정도다. 사실, 가끔 벅차다. 그럼에도 우울증이 극에 달한 누군가들을 상상하며, 그들 앞에서 투정부리는 스스로를 생각한다. 우울증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알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히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우울한 열정’마저 사치이며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음에 조심스러워진다. 방어 기전일까. 그래도 우울감 앞에서 신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은 신중하게 나의 정도를 가늠해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어떤 때까지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우울할 수밖에 없으며, 내가 느끼는 우울감은 그로인한 인간 보편의 우울감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헷갈렸다. 매일같이 우울했던 것도 아니니까. 어떤 때는 스스로에 대한 비이성적인 낙관에 끝없이 들떠있기도 했다. 내가 떠올린 생각들에 스스로 감명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쉴 새 없이 떠들던 때도 있었다. 모든 것을 긍정하고,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 아닐까, 꽤나 확신 같은 예감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감정의 자연스러운 상승하강 곡선이라고. 다만, 나는 남들보다 예민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럴 때는 언제나 잠시였다. 때마다 스스로 덮어두고, 덮어두던 존재들의 뿌연 잔상이 앞을 가렸다.


스스로가 애처롭다. 스스로를 우울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글을 쓰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부정한다. ‘겨우’일뿐이라고. 삼켜버린 감정들을 뱉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뱉어낼 것이 없다. 뱉어냈다고도 생각했는데, 뱉은 것이 없다. 한없고 끝없는 감정에 냉소를 보인다. 스스로를 냉소하는 것. 차가운 것 앞에서 차가워지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벤야민은 토성이 물에 뜬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 무거워 보이는 행성의 속이 사실은 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토성은 나의 우울감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잔상과도 같은 것들로 이뤄졌다. 잴 수 없으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것들로 이루어진 행성. 광년의 거리에서 봐도 너무나 거대한 행성. 한 품에 안을 수 없게 됐을 때부터, 토성은 내게 묵직해졌다. 차가운 고리들이 손끝도 닿을 수 없게 한다. 가까이서는 보이지 않는 고리들이 토성을 옭아맨다. 이제는 안으려 해도 으스러질 뿐이다. 토성은 고리를 우회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토성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조용히 공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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