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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Jun 28. 2017

인간 혐오

바로 며칠 전, 공모전에 글을 하나 냈다. 시민의식 고양을 위한 문제제기와 해결책을 제시하는 에세이 공모전이었는데, 나는 각종 ‘혐오’에 대해서 썼다. 상생이 가장 필요해진 시대에 상생을 불가능케 하는 ‘혐오’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유를 고민했었다. 생각해보면 인간 종(種)에 대해 혐오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 우리가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듯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고 대부분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거나, 싫어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어쨌든 이러저러한 맥락들을 거쳐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 종(種)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니, ‘사람’으로서 서로 이해하며 사랑하자는 것이었다. 글을 쓰며 최소한 모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자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하는, 천진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작 나조차도 버겁다. 이해를 바라는 마음에 쓴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혐오스럽다. 특정 집단을 향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차별하지도 않으니, 공모전에서 다뤘던 혐오와는 결이 다르지만, 인간이 너무 혐오스럽다. 얼굴만 봐도 불쾌해지는 사람들이 있고, 단 한마디의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거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들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 혐오의 이유들을 일일이 내보이는 것은 좀스러우니. 그저 나 역시도 많이 생각해봤으나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을 한 종류로 본다는 것이 내 문제라면 문제다. 개개인의 문제도 인간 전체의 문제로 확장하는 왜곡된 인식 탓에, 누군가에게 혐오감을 느낀다면 비슷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혐오감이 전이될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스스로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봤지만, 나는 이 혐오감을 상쇄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 도저히 혐오스러운 인간들을 참아낼 방법이 없다. 유일한 방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어차피 보지 않으면 그만인 사람들로.



사실 진짜 문제는 자기혐오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인간 실격』이나 나쓰메 소세키의『마음』처럼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인간에 대한 혐오로 확장하는 것은 아주 큰 ‘오만’이 필요한 일이지만, 불완전한 인간인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만 보고, 본 만큼으로 판단할 수밖에. 누군가가 혐오스럽다면, 우선 나는 스스로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는데,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스스로에게 혐오를 느낀다는 것,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려 한다는 것.  사랑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려 한다. 스스로에 대한 모순적인 관점을 아주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이 애증의 감정은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고, 나 스스로에 대한 감정에 국한된 것도 아니건만, 익숙하기만 할 뿐 나는 여전히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생존본능일까. 내 행동에, 생각에 비춰 봐도 이해할 수 없다.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불확실함, 그 한 가지 뿐이다. 그렇게 여태껏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살아왔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서머싯 몸은 이렇게 말했다.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상대를 다 알고, 그래도 더 알기 위해 힘껏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조금씩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무리 열의를 담아 상대를 사랑하려고 해도, 아무리 친밀하게 관계하려 해도 어차피 상대는 낯선 타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헌신적인 남편과 아내조차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침묵한 채 누구에게도,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보여줄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몸이 말한 ‘상대’를 ‘나 자신’으로 바꿔도 말이 된다. 나에게 ‘나 자신’이란 그런 의미다. 이해받을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알 수 없는 존재, 그러니 언제나 낯설 수밖에 없는 존재.『단지 세상의 끝』에서의 루이의 독백처럼,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 내가 나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완벽한 환상이다. ‘나 자신’은 ‘나 자신’이면서도 명백한 타인이다. ‘나’라는 타인부터 이해할 수 없으니, 모든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혐오스럽고, 혐오는 이해를 불가능케 한다. 나는 인간을 혐오한다.



아니, 이건 자기기만이고 방어기전이다. 나는 스스로를 혐오하지도 않고, 인간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내가 왜 스스로를 혐오하며 살아가야 하며, 인간을 혐오해야 하는가. 진실로 인간을 혐오한다면 생을 지속할 이유도 없다. 인간이 빠진 인간의 삶에 무엇이 남겠는가. 모두를 혐오함으로써 내가 벽을 치는 이유를,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여유 없음을 긍정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단지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맞춘다는 것이 역겨운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 자신이 불완전한 것처럼 모든 인간들이 불완전할 뿐이다. 인간 종이라는 조각들이 만드는 인간관계는 언제나 마찰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다. 알기 때문에, 나도 나를 사랑하고 싶고, 인간을 사랑하고 싶다. 다만, 어려울 뿐이다. 타인을 혐오하는 주체인 ‘나 자신’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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