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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Aug 29. 2017

자기 규정의 행위

깨뜨리고 깨뜨리고 또 깨뜨려야 했다.
구원은 그 대가로만 얻어졌다.

대리석 안에서 올라오는 민낯의 그 얼굴을 부수기.
모든 형태 모든 아름다움을 망치로 때려 부수기.

완성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어딘가로 통하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성이라 인정되는 순간 부정되고 죽는 순간 잊히나니.

미완성이 절정이다.

미완성이 절정이다 / 이브 본느프와
















나의 말과 행동은 나를 규정한다. 아니, 나의 모든 것이 나를 규정한다. 찰나의 숨소리, 순간의 표정들을 숨길 수 없다. 이 글 조차 그렇다. 그렇게 매순간, 나는 규정된다, 또는 규정한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아니라고 해도 그렇고,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규정되는 순간, 틀에 갇힌다. 모든 것이 멈추고, 부숴야 할 벽이 생긴다. 규정이라는 틀은 한계를 내재하며, 틀에 부어진 한 인간의 형질은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히 굳는다. 틀을 부수는 순간, 허망하게도, 또 다른 틀이 주조된다. 완전함이라는 환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한의 벽들을 무한히 부수어야 한다. 무한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만족은 안주安住이며 게으름이다. 허나, 무한의 굴레에서는 누구도 성실할 수 없다. 완전함을 위한 욕망은 결국 파괴만을 반복한다. 아니, 실체가 없는 완성이라는 허상은, 잡을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허상을 좇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규정을 곧 정체停滯로 여기는 내가, 규정된 나를 부정하기 위해. 나를 조금이라도 다르게 규정하기 위하여 쓴다. 그렇기에 나의 글은 언제나 변명, 쓸데없는 사족으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쓴다. 끝이 없음을 알면서도, 오로지 나를 위한, 나 자신의 변명을 쓴다. 나는 왜 정체할 수 없는가, 무엇이 나를 무한의 굴레에 밀어 넣는가를 고민하면서.

  

아니, 그전에 나는 왜 나, 스스로의 삶을 변명하게 되었는가. 나의 정체停滯는 왜 안정이 될 수 없는가. 나는 왜 나를 설명하는 규정들을 참아낼 수 없는가. 어째서 입은 것들을 도로 벗어야 하는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침묵으로 일관했던 적들도 있다. 허나, 어떤 침묵과 부동不動으로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무슨 말도 할 수 없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때가 온다. 영원한 침묵과 부동不動의 상태에 있는 존재는 부재不在일 뿐이니. 나는 쓸 수밖에 없다. 쓰면서 나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글 역시 미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스스로를 벗어날 수 없고, 완성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끝내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완성을 바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쓴다. 다만, 끝은 있다. 생의 동기가 곧 죽음이듯, 나에게 ‘쓴다’는 것은 자기규정의 행위의 지속적인 반복이지만, 스스로 어떤 것으로도 규정되고 싶지 않은 모순의 발로이자 동시에 필연이며, 그 자체로 생의 행위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모든 것이 부서져 조각난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허무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위안이 된다.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나는 그저 나의 생의 한순간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깨져버릴 순간들에 대해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번 온 힘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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