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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Jun 14. 2024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 시>에는 소설이 끝이 날 때까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한 남자가 있다. 팔라메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팔라메드는 오후 네 시만 되면 이웃인 주인공 부부의 집으로 가 노크를 하고, 커피를 한 잔 받아 든 뒤 대뜸 거실의 안락의자를 차지한다. 그리고는 주인공 부부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고 어떠한 질문에도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대답하기를 회피한다. 아주 가끔 최소한의 정보만을 담은 대답ㅡ진실인지도 알 수 없는ㅡ을 내놓을 뿐. 그 어떠한 형태로도 ‘소통’이라고 일컫을 만한 무언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주인공 부부와 마찬가지로 독자인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직업이 의사라는 것, 건강하지 않은 아내와 다소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정도에 그친다. ㅡ지나치게 비정상적이지는 않다는 점이 팔라메드라는 인간을 더욱 모호한 존재로 만든다ㅡ 그렇게 이렇다 할 소통이 없는 무의미한 만남의 형태가 하루에 2시간, 매일 같이 이루어진다. 주인공 부부는 교양 있는 태도로 은근하게 팔라메드의 방문을 거절하거나 집을 비우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지만 오후 네 시가 되면 팔라메드는 어김없이 그들을 찾아온다. 불가피하고 예정된 재앙과 같은 만남ㅡ심지어 주인공 부부의 입장에서 팔라메드는 어떠한 선의도, 친절도 갖추지 못한 무례한 인물로 그려진다ㅡ에 질려버린 주인공 부부의 남편, 아내와 함께 인적이 드문 전원에서 평소 꿈꿔왔던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자 했던 에밀은 소설의 말미에 그 남자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오후 네 시>에는 사회적 체면과 도리를 지키고자 애쓰는, 배려 깊고 선의를 가진 인물인 에밀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에 치닿게 되는 과정ㅡ다소 과장된 서사로 느껴지긴 하지만ㅡ이 묘사된다. 이 과정을 통해 팔라메드가 아니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스스로에게마저 낯설어지고 마는 에밀을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일의 불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소 지루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지지만서도, 내가 이 책에서 흥미를 느꼈던 지점은 우리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시도하는 방식과 이 방식이 종국에는 타자를 파괴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주인공 부부는 팔라메드와의 만남에서 팔라메드를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를 알아내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비록 몇 가지 정보들을 알아내고, 그의 아내와 만나고, 그의 집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그렇게 얻어진 모든 사실 역시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것들 뿐이다. ㅡ애초에 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라는 부차적인 물음을 제외하고서라도ㅡ 그렇기에 주인공 부부와 독자인 나 역시 주어진 것들을 통해 팔라메드라는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해 보지만, 팔라메드는 채울 수 없는 수많은 공백으로 가득한 존재로 여겨진다. 에밀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상상을 동원한다.


“그가 내 간단한 질문에 15초나 뜸을 들인 후에야 대답하는 것은 내 질문이 부질없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에밀은 대답을 거부하는 그의 비정상적인 소통 방식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며, 팔라메드를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실상 어떤 이유에서 대답을 ‘망설였을지도’ 모르는 팔라메드의 행동 거지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치환하기 위한 에밀 만의 방법이었다. 이렇듯 에밀처럼 우리는 ‘허구’를 동원해서라도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우고자 한다. 우리는 ‘겨우’ 스스로가 아는 방식대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육중하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 숨 막히게 하고, 최대한 예의 없고, 최대한 공허해야 했다”*는 에밀의 표현처럼 공백처럼 비워진 존재는 모든 것이 될 수 있기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허구’는 일시적이거나 일회적인 관계 안에서만 그나마 기능할 뿐, 누적되는 허구는 우리 앞에 있는 누군가를 완전히 왜곡해 버린다. 소설의 말미에 다다르면 에밀은 팔라메드가 자살을 시도한 것을 근거로 삼아 그를 삶 자체에 무력한,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는 한 남자로 만들어버리기에 이른다. “나는 더 이상 내 행동이 옳았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목숨을 구한 내 행동을 후회했다. 사태를 완전히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하지만 팔라메드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은 에밀의 판단이기에 팔라메드가 정말로 자살을 시도했는지, 단순한 사고였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신에 가득 찬 에밀은 팔라메드가 스스로 삶을 끝내는 일을 방해했다는 미안함에 ‘배려심 깊은 태도’로 그의 자살을 방해한 것을 사과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에밀의 이야기를 들은 팔라메드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에도 불구하고 에밀은 팔라메드가 자신의 삶을 무가치하게 느끼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웃집 남자의 삶이 공허 그 자체라고 결론 내리는 데에는 그런 극단적인 예까지도 필요치 않았다. 그의 공허는 위고가 묘사한 위대한 공허가 아니라, 비열하고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고 보잘것없는 공허였다. 가엾은 인간의 불평으로 가득 찬 허무였다.”


그렇게 에밀은 팔라메드를 위한 이타적 행위로써 팔라메드를 살해한다. 지극히 평범한 교직 생활을 마치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노년을 보내고자 했던 에밀은 남은 생 동안 살인자가 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며 살아가야 할까? 그보다도 팔라메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오해에 그치게 되고, 필연적으로 팔라메드를 살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타인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종국에는 타인을 파괴하는 것에 다름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에밀이 살인이라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에밀은 팔라메드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절대적으로 상실하게 됐다. 특히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은 팔라메드ㅡ거의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ㅡ 라는 사람에 대해 에밀 자신이 얼마나 강하게 확신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주저하게 만드는 과격한 결말을 보고서도 우리는 어떻게 수많은 오해를 감내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이 책의 결말처럼 다소 급진적이지만,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면 좋을까.


일견 이 책이 다소 비현실적일 정도로 비정상적인 주인공 부부와 팔라메드의 소통의 형태에 기반을 둔 것처럼 진정한 형태의 소통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것까지는 이 책의 역할은 아닌 것 같기에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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