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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Jun 02. 2018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사랑을 행하기 위하여”

Agnes Varda가 수행한 『타자를 향한 존재론적 모험

“사랑을 행하기 위하여”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Visages, villages>을 통해

Agnes Varda가 수행한『타자를 향한 존재론적 모험』(Colin Davis)


                                                                          * 책의 저자의 표현은 ‘’ 작은 따옴표로 인용.

                                                         *   인용된 레비나스의 표현은 “”  따옴표로 재인용.

                                                                                   * 영화  인물들의 말은 「」로 표시.
                                                        * <Visages, villages>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있지만, 의미의 불충분함으로 원제 사용.


저자는 묻는다. ‘토대 없는 윤리, 보편성에의 명령이나 요구 없는 윤리는 가능’한가? “경험 없는 경험”이자 “관계 없는 관계”로 맺어지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떻게 윤리를 수행할 수 있는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 레비나스가 마치 “신”처럼 묘사하는 타자를 향한 윤리가 애초에 가능하기나 할까. 결국 레비나스의 기준에서 ‘윤리’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모든 행위는 편협한 존재론적 의식의 폭력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허나 이러한 물음들은 다소 허무하게 매듭지어진다. ‘레비나스 역시 자신의 사상이 유토피아적 측면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가 말하는 윤리란 “휴머니즘”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생득적인 인간성에 가깝다. 그렇기에 ‘자신의 (윤리적) 책임에는 한계’가 없고 “그가 빚지고 있는 것보다 더 타자에게 요구하는 일은 범죄”라고 말한다. 끝없이 타인을 향하던 레비나스는 결국 회의주의에 닿는다. 우리는 타자에게 무언가 기대할 수 없고, 그저 자신의 “인간성”이 지향하는 윤리를 수행해야 한다. 그 윤리는 고작 다음과 같다. “마음의 선물이 아닌, 자기 입에서 떼어낸 빵 한 조각, 자신의 한 입의 빵을 주는 것”


레비나스를 읽으며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가 그저 헛헛했다. 그가 말하는 윤리는 마치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타인이라는 어떤 당위처럼 들렸고, 그 수많은 고민들이 보상심리로 수렴되는 듯 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에서 나의 존재는 앞서 존재하는 타자에 짓눌려 희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헛헛함은 분명, 공허와는 달랐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결국 존재론으로 귀결된다. ‘레비나스는 책임을 통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미끄러지듯, “나의 책임은 무엇인가? 어떻게 나는 나의 이웃에 대해서 책임적인가?”라는 물음으로 이동한다. 독자는 이 텍스트를 만들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든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윤리, 정확히는 “윤리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레비나스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이것 하나는 강조하고 싶다. 무엇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최소한 윤리 만큼은 누군가의 사유에 기대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의존적 윤리는 진심을 기반하지 않는다. 그저 동정이고 연민이다. 레비나스가 윤리를 ‘상대주의’로 만드는 것은 아니듯 각자의 것으로 파편화된 윤리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그저 막연히 사랑을 생각한다. 레비나스가 말했던 ‘에로스적 사랑’. 아마 사랑은 진심에 근거할 수밖에 없기에 당연히 타자를 위하는 윤리를 수반하지 않을까.


 ‘에로스적 사랑에서 자아나 타자는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 둘 모두는 사실 확고해지는데, 타자Other는 타자Other로서 욕망되지, 동일자로 환원되는 타자other로서 욕망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이는 애무 받지, 소유되지는 않는다’


한참 부족한 인간이기에 내가 말하는 책임과 윤리는 끝내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도리어 모르기 때문에 사랑을 윤리와 등가시킨 레비나스에 공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Agnes Varda 영화를 통해 사랑이라는 윤리에 관해 말해보고자 한다. 단, 나는 학문적 논의와 존재론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적 성찰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Other과 other의 구분을 배제하고 조금 더 단순하게 타인 설정한다. 나는 일상적인 삶들을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Agens Varda의 영화와 같이 개념에 가까운 인간이 아닌 보다 인간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바르다, 고작 2편의 영화를 본 것이 전부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영화는 할머니 품처럼 따뜻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결코 포근하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그녀는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 고흐-존 버거… 앞으로도 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계속 곱씹어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사랑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니까.


                                                                               1) 타인의 발견, <이삭 줍는 사람들과 >

바르다는 g에서 gleaning(이삭 줍기)을 떠올리고, 이삭 줍기는 마치 당연한듯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상기시킨다. 바르다의 연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제는 소수에 가깝지만 여전히 길거리에서 허리를 숙이며 무언가를 줍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흔치는 않지만 허리 숙인 그 모습이 이 배부른 사회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g에서 거리의 허리 숙인 사람들까지, 거의 무관한 것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아예 상관없다고 할 수는 없는, 이 필연 같은 우연의 연상 작용은 마치 레비나스가 무한자로서의 타인를 발견하는 과정과 겹쳐 보인다.


바르다가 말하듯, 이제 줍는 사람들의 모습은 밀레의 그림 같지 않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줍고, 더 이상 공동의 행위도 아니다. 각 개인으로 흩어진 그들은 무엇을 줍는 걸까. 바르다는 혼자 이삭을 짊어지고 있는 인물이 그려진 쥘 브르통의 작품을 보여준다. 이 인물은「배부른 사회」라는 바르다의 지적과 맥락적으로 연결되어, 가난 역시 개인화된 현대 사회를 비판적으로 진단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가난은 철저히 개인의 책임이다. 바르다는 밀레의 그림 옆에서 매고 있던 밀포기를 내려놓고 카메라를 든다. 그녀의 방식으로 허리를 숙이기 위하여.「몰아적이며 극사실적인」디지털 카메라는 동기적 윤리성을 담보한 리얼리즘 영화를 추구하는 바르다의 의식, 그 자체다.


줍는 사람들을 포착하기 위한 첫 번째 행선지는 밀 산지로 유명한 보스다. 하지만 이삭 추수철이 끝났고, 사람들은「기계로 들어올리다보니」남게 된 수많은 감자들을 줍고 있다. 공장에서 선별 작업을 통해 버려지는 감자도 상당수다. 소비자의 선호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바르다는 무료 급식소를 떠올린다.「인원을 짜서 감자를 버리는 날 맞춰서 가면?」바르다는 실직 중에 있음에도 남을 돕는 무료 급식사업에 참가한 사람을 만난다. 그는 버려지는 감자들을 보면서 말한다.「더 딱한 이들을 도우려구요. 쫄쫄 굶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참 낯뜨거워요」


결국 줍는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바르다와 (아마 우리 모두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우리 시대의 빈자들이며, 바르다는 이 영화를 통해 낭비에 관한 것들을 윤리적인 것으로 특정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바르다가 이삭 대신 감자를 줍는 사람들을 만나고, 무료 급식소를 떠올리는 와중에 무료 급식사업에 참가한 사람과 마주친 이 모든 일은 그저 우연일 수는 없다. 바르다와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바르다의 영화를 통해 만난 일 역시 필연 같은 우연에 가깝다. 그렇다면 윤리적인 것이란 생득적으로 공유되는 의식을 바탕으로 추동되는 행위이지 않을까. 윤리는 인간성에 내재한 일종의 지향성이라는 레비나스의 생각처럼 말이다. 그렇게 감자 밭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통해 트레일러족을 만난 바르다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타인들을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다.


하지만 빈자들만 줍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인를 연민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다름없다. 줍는 행위가 사회적 계층을 은유(-손택)해서는 안 된다. 이에 바르다는 미슐랭 투 스타 식당의 요리장을 보여준다. 그는 재료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요리할뿐더러, 직접 허브를 키우고 농장에 떨어진 과일들을 주워 요리에 활용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 초반에 등장해 다소 문제적으로 들린 바르다의 말을 납득하게 된다.「(줍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이나 걱정 따윈 없다」정확히는 없어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줍는 행위를 연민하고, 뒤이어 등장하는 슈퍼마켓 주인은 줍는 행위를 좀도둑질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줍는 행위를 문제적으로 바라보는—특히 줍는 행위는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식의—사람들의 시선을 인지한듯, 바르다는 밭의 법관이자 목사인 드수드씨를 등장시킨다. 성복을 입고 성서를 안고 등장한 드수드씨는 옛 율법 역시 이삭 줍는 행위를 독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앞서 말했듯 줍는 행위는 빈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바르다는 취미 삼아 줍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묻는다.「그 또한 줍는 취미가 필요하니까 그렇겠죠. 시기를 따져서 빈자들처럼 주워도 되겠죠」


앞서 윤리는 우리가 공유하는 의식에서 추동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렇듯 그 의식은 모두에게 똑같이 공유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윤리”란 없는 것이 맞고 우리는 결코 레비나스가 상정하는 윤리적 동일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윤리적인 것”이 존재할 뿐.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더욱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들은 노년에 접어든 바르다가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처럼, 끝없는 자기반추를 통해 의식을 환기시켜야 한다. 우리의 행위가 윤리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무엇이 윤리적인 것인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포근하고 따뜻한 바르다의 영화지만, <미카엘 천사의 심판>이 보여주듯 이러한 성찰은 결코 사소하거나 가벼울 수 없다.


또한 바르다는 이 성찰에 얼마나 치열한 노력이 필요한지도 알고 있다. 마스터 와인에 쓰일 포도를 재배하는 장 라플랑슈의 포도밭은 부르고뉴에 있다. 장 역시 와인의 가치를 위해 포도 수확량을 제한하고, 남는 포도 역시 따가지 못하게 하는 부르고뉴의 정책에 의한 낭비를 안타까워 한다. 그런데 그는 자아에 우선하는 타인, 즉 반-자아설에 주력하는 정신 분석의이기도 하다. 바르다는 장에게 묻는다.「두 일이 잘 이루어지나요?」「좀 걸리지 않나요?」그렇다고 장이 지금껏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 포도 줍기를 허용하는 지역으로 옮겨갈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의식의 환기만으로는 윤리적으로 행위할 수 없다. 장의 사례처럼, 자기 모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바르다는 자신의 행위—영화 제작—를 반추해본다.「이런 식으로 이미지나 인상을 줍는 일은 법에 저촉될 게 없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지적활동이다」보통 핍진성이 높은 영화 이미지는 현실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매체로 인식된다. 그 근본적 가상성에 의해 언제나 진실성을 의심받기도 하지만 그 반대—특히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화 이미지의 양가적 속성에 비추어 볼 때, 바르다는 진실로 현실적이며, 윤리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다의 성찰은 영화를 넘어 주체에 대한 것으로까지 나아간다.「이런 게 내 계획이다. 한 손으로 다른 손을 찍는 것. 짐승이 된 기분. 더구나 정체 모를 짐승」타인화된 자신의 손을 마치 짐승처럼 묘사하는 바르다의 행위는 자아와 타인 사이의 관계를 전복시켜 “통약 가능성”에 함몰시키지 않는 것을 넘어, 자연히 자아와 타인의 “있는 그대로”의 공존을 추구하는 레비나스를 연상시킨다. 하지만「손을 떼면 램브란트의 자화상이다」라고 하며, 평생 자화상을 그린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여준다. 자아는 타인의 타인으로서, 신과 같은 타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타인화하는 자기반추의 과정 역시 무한할 수밖에 없음을 또 한 번 강조하며 단순한 성찰을 넘어선다.


이제 바르다는 썰물에 쓸려나온 양식장의 굴을 줍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주체에 의한 타인의 윤리의 가능성에 대한 탐문으로 돌아간다. 굴을 줍는 사람들은 주울 수 있는 장소와 수확량이 불문율처럼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정도와 범위를 구체적으로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행하는 윤리는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윤리와 윤리도 때때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윤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우리는 결국 앞선 레비나스의 통찰에서 도출된 결론,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을 위해 자아인 동시에 타인로서. 타인인 동시에 자아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동물 역시 우리의 타인다. 아니 모든 생生, ‘근본적으로 나와 비슷’한 모든 것들이. 사실 나와 비슷한 근본을 가진 존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비슷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레비나스가 말한 타인은 나에게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다. 바르다도 비슷한 것 같다. 포도 가지를 잘라내는 가위를 보고 가지치기 춤이라고 하더니, 실수로 촬영 버튼을 눌러 찍힌 카메라 렌즈캡이 흔들리는 모습을 그 가위춤과 병렬시켜 생명성을 부여한다. 이건 분명한 비약이지만,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 역시 유토피아와 같다는 점에서 일종의 비약이고, 그러니까 윤리라는 건, 결국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바르다는 말한다.「동물들이 길을 가로막는게 좋다. 그러면서 서 있는게」결국, 우리는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현상적으로 타인이 보이는 어떠한 한 시점에서. 그러니까 윤리는 당위적인 것이고 구태여 어찌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서 동물들에게 경적을 울리면 길을 비킬까. 오히려 동물들이 차에 달겨들지도 모른다. 경적이라는 신호는 인간이라는 특정 주체들 사이에서만 인지될 수 있는 신호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이 경적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것도 아니다. 경적 역시 그저 소리에 불과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도 타인을 이해시키는 것도 어렵다.


이제 바르다의 시선은 줍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한다.「막 살아있던 생생한 과거를 보여주니까」길거리에서 폐품을 주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일은 나한테 하나의 윤리에요. 길바닥에 순 낭비인데」쓰레기통을 뒤져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낭비되는 것들에 대한 사회의 무의식을 꼬집는다. 낮에는 장사가 끝난 시장 바닥에 나뒹구는 채소와 과일을 주워 먹다가 저녁엔 이민자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보조교사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바르다 역시 이들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 아래로 향한다. 그러니까 빈자들을 위한 윤리를 행하는 동시에 자신 역시 빈자가 된 사람들. 기꺼이 타인이 된 사람들이 있다. 종국에 레비나스가 윤리를 “마음의 선물이 아닌, 자기 입에서 떼어낸 빵 한 조각, 자신의 한 입의 빵을 주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레비나스의 윤리는 육체적이며 원초적인 것이다. 가장 근본적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혹은 자신이 말하는 윤리와 윤리적인 것을 구분하기 위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바르다가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를 통해 수행한 타인의 발견을 윤리의 시작으로 본다. 레비나스가 말했던 “말함”처럼, “이웃에게 다가가는 것”으로서의 행위, 그 자체로서의 윤리. 결코 정련화될 수 없는 윤리에 대한 어떤 시작. 이 역시 상당한 결심을 필요로 하지만,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시작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까.


                                                                         2) 사랑을 행하기 위하여, <Visages, villages>

이를 위해 바르다는 JR과 만난다. 즉, 타인과 타인이 만난 우리라는 자아는 만남의 대상이 되는 타인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기꺼이 타인이 되는 것 이상의 윤리를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그들은 서로의 작업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까지 길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빵집에서도, 댄스홀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이 만나야 할 장소는 <Visages, villages>이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JR과 그녀는 외딴 장소들을 찾아 사람들의 얼굴을 찍고, 크게 출력해 어딘가에 붙이는 작업을 수행한다. 벽들, 기둥들, 급수탑, 기차 화물칸 등. 사진기와 트럭 한 대면 누군가를 만날 채비가 끝난다.「만난 얼굴들이 바로 기억의 공백으로 사라지지 않게 사진을 찍었다」라는 바르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건 어떤 삶들, 즉 타인과의 만남을 기록하기 위한 그들의 방식이다. 그것도 사진이라는,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선명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는 바르다의 말처럼 기억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말로는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이 찾아간 광산 인근의 마지막 철거촌을 지키는 자닌은 이 기억을 몸소 수행하는 인물이다. 자닌은 광산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품에서 꺼낸 까만 빵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아마 아버지를 사랑하는 한 절대로 잊지 못하리라. 또한 지역 조수인 프리데릭의 집에는 JR과 바르다가 봤던 엽서가 걸려있다. 어떤 우연인지, 그 엽서 속의 인물은 프리데릭의 아버지였다. 바르다와 JR은 자닌과 프리데릭에게 사진을 선물한다.「이미지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간직하게 도울게요」그렇게 기억 속에만 남은 자신의 모습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커다랗게 출력되어 다시 그들에게 도래할 때, 사람들은 어떤 벅참을 느낀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얼굴은 어떤 존재가 본래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계시”로서 자아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는 가장 직접적인 매개다. 우리가 누군가를 떠올릴 때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그건 “계시”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과 관련한 기억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그 얼굴에는 서로와 서로가 주고받은 모든 것들에 대한 감정이 들어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에게 단지 얼굴일 뿐인, 어떤 얼굴들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즉,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행위는 JR과 바르다에게 “활기”, “에너지”를 준다는 점에서 타인의 “향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기록의 행위는 대상이 되는 타인들을 “소유”하거나 “파악”하여 포섭하지 않는다. 오히려 JR과 바르다에 의해 타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기록되면서 온전히 존재하는 것을 넘어 “확고”해진다. “얼굴이 얼굴로서 드러나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열린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라고 말했던 것처럼 레비나스에게 가장 강렬한 상태의 윤리는 그 윤리의 존재조차 잊게 하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르다와 JR의 얼굴-기록-사진은 사랑으로 치환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났고, 짧은 시간 만날 수밖에 없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몇 없는 방식 중 하나이지 않을까.


JR과 바르다는 이 사랑의 행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자 한다. 셰랑스에서 만난 8백 헥타르의 농지를 혼자서 관리하는 농부는「혼자가 좋아요」라고 하지만 동시에「저녁엔 즐겁게 가족에게 돌아가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남자의 사진을 창고에 커다랗게 붙인다. 광활한 농지 앞에서 쓸쓸한 웃음을 지었던 그는 당분간 최소한 외롭지는 않으리라. JR과 바르다가 찍은 마을의 한 여인의 사진은 SNS에 퍼져 그날로 마을의 유명인사가 된다. 그저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했던 그녀의 존재가 더욱 “확고”해졌다.


이러한 사랑의 기록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관계 없는 관계”를 맺기도 한다. JR과 바르다는 에밀리와 에밀의 사랑을 만난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들의 사랑만은 손주를 통해 이야기로 전해지며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바르다와 JR은 그들의 사진을 다시 사진으로 기록한다. 사진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 또 한 번 기록한다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보다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자, 지금 만날 수 없는 타인과 만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10년 전 종지기가 된 방상 역시 마찬가지다. 종지기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종 치는 법을 전수해줄 계획이다. 사랑하던 아버지가 물려 준 일을 자신의 아들에게도 물려준다는 것. 이를 통해 아들은 아버지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평생 몸담은 일을 전하는 일이 사랑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 기록과 기억 자체가 사랑의 발현이 될 수 있는 이유이자, 어쩌면 영원히 이어질 수도 있으리라 상상할 수 있는 이유, 그리하여 타인을 위한 궁극의 윤리가 마치 영원처럼 여겨지는 사랑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닐까.


JR과 바르다는 원래 영화관이었던—이또한 필연 같은 우연이다—장소에 자리 잡은 세뜨아루누생또방 공장으로 찾아간다. 여기서는 개개인의 초상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 조로 나눠 단체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단체 사진 속 개개인을 그 사진 앞에 서게 해 다시 한 번 카메라로 담는다.「얼굴마다 사연이 있다」사실 JR과 바르다 역시 자신들의 작업물 앞에서 계속 자신들의 모습을 찍고 있다. 기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다. 분명 이또한 카메라로 찍은 장면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재현된 기록과 실재를 마주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리하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우리는 타인과 타인이 만나는 과정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타인과 실제로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 바르다는 여기서도 자기 자신—주체—에 대한 성찰을 이어간다. 자아와 타인을 인간에 한정 짓지 않고, 인간이 아닌 생명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JR과 바르다는 함께 시장으로 가 생선들의 사진을 찍어 급수탑에 붙인다. 무언가를 붙일 수 있는 공간 가운데, 물에 사는 물고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죽은 생선의 눈을 자신의 눈과 오버랩시킨다. 사실 바르다는 눈병이 있어 주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태다. 치료가 무섭지 않았냐는 JR에 말에 그녀는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나온 한 장면을 말한다. 관객의 시선은 바르다 목에 있는 눈 모양의 목걸이로 흐르게 된다. 그렇다. 감독 바르다에게 눈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보고, 기록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그 작업을 통해 타인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점이 맞았다가 흐려졌다를 반복하는 시퀀스가 덧붙여진다. 끝이 다가오는 이가 바라보는 세계 같다. 그래서 그녀는 눈에 주사 바늘을 대는 것보다 영영 보게 될 수 없을 때를 두려워한다.「이미지는 사라졌고 우리도 사라지리라」바르다가 지속적으로 죽음에 대해,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타인을 바라보는 윤리를 수행할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지 않을까.


이제 바르다와 JR은 짓다가 버려진 마을, 삐루 쁠라즈에 도착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곳을 되살려보려고 한다.「텅 비었던 곳이 갑자기 꽉 찼어요」바르다가 말하듯 얼굴이 사라진 곳에는 활기가 없다. “(타인의) 무한성에 대한 사유에 근거함으로써 주체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처럼 자아의 세계는 타인이 부재하는 공간에서는 구성될 수 없으며, 자아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세계가 존재하는 이상, 타인은 무한히 존재하는 “신”적인 존재다. 즉, 의식할 수 있는 대상이 부재하는, 타인이 없는 세계는 공허하며 비(無)인간적이다.「세월이 흐르면서 집들이 무너지는 걸 봤어요. 끝 마치칠 못했어요. 이상해요」나는 존재했던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비존재하는 것과 다름없게 된 그 광경이 마치 죽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죽지만 나에 대한 흔적 혹은 기록은 한동안 남아있을 것이라는 그 이상한 느낌.


「원래 있었으면 그대로 둬야죠. (뿔) 없애는게.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아요」 전통적인 낙농 방식으로 염소를 키우는 축산업자의 말이다. 앞선 죽음에 대한 고찰은 뿔이 잘리지 않은 이 염소를 매개로 이어진다. 바르다는 자신의 젊은 날 상또방수르메르에서 찍은 염소 사진 <율리시스 : 1982>를 기억해낸다. JR 역시 그 해변에서 오토바이를 탄 기억이 있다. JR과 바르다는 그 해변에 떨어져 박힌 커다란 요새 조각을 발견한다. 바르다와 JR은 그 요새 조각에도 사진을 붙이고자 한다. 바르다는 기 보르당과 함께 사진을 찍던 시절을 회상한다.「이제 사진은 생각 안 나고 기만 기억해요」 그렇다. 기억은 사라진다. 언젠가 벽은 갈라지고 집은 무너진다. 내리는 비에 조각날 것이고, 부는 바람에 날릴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기억도 언젠가는 흔적만 남고, 그 흔적 조차 사라질 것이다. JR과 바르다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행위는 그저 기억의 사라짐을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나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유한한 존재가 기록함으로써 끝없는 지연을 소망하는 건 영원을 바라는 듯 허망하게 보였다. 죽어가는 마을을 살리는 것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요새에만은 사진을 붙이지 않기를 바랬다. 너무나 일찍이 사라질 기억 앞에서 바르다가 느낄 상실감이 걱정됐다. 역시나 그 사진은 파도에 금방 쓸려갔다. 하지만 바르다 역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조금 두렵기도 했다. 기억을 위한 그 기록은 파도를 타고 어디로 갔을까.「이미지가 단명하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파도는 너무 빨랐다」그렇게 쉽게 스러져 흩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그저 허망할까. 바르다는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말한다. JR이 묻는다.「죽음이 두려우세요?」「많이 생각하는데 두렵진 않아요. 갈 땐 가야죠. 모든 게 끝이 있잖아요」바르다는 기록이 가지는 일시성에 자신의 삶—평생을 기록해 온—을 빗댄 것이리라.


끝을 향해가고 있는 JR과 바르다의 작업은 항만 노동자 부인들에게 닿는다. 일시적인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지만, 이들은 자신이 아닌 항만 노동자의 부인으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삶을 살더라도,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모습으로 그려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크리스토프(자신의 남편) 뒤에 있어요. 늘」이라는 한 여성의 말에 바르다는 대답한다.「왜 옆이 아니라 뒤에 있죠?」그녀들의 사진을 컨테이너에 토템처럼 붙여 놓으며, 그녀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윤리이자, 관습을 깨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바르다는 JR이 모는 휠체어를 타고 루브르를 누빈다. 마치 장 뤽 고다르의 영화 <국외자들>처럼. 이는 죽음으로 수렴되는 노년의 삶이 가지는 관성에 유쾌하게 저항하고자 하는 바르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상 영화는 여기서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고, 에필로그와 같은 JR과 바르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JR은 바르다의 눈과 손과 발을 찍어 기차 화물선에 붙인다. 자신의 발을 보고「주름진 심장 같다」던 바르다의 말처럼, 바르다의 눈과 발이 붙은 기차는 바르다가 가지 못하는 곳까지 닿아 부지런히 사랑을 전할 것이다. 바르다의 삶을 존경하고 응원하는 JR의 선물이다. JR과 바르다는 이 영화를 통해 서로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타인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기억을 보다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됐다.


「고마워요 JR. 좋은 여행을 시켜줘서」바르다 역시 마찬가지다. 바르다는 보답으로 JR에게 고다르를 소개시켜주려고 한다. 허나, 잘은 몰라도 자끄가 죽은 후로 둘의 관계도 어려워진 듯 하다. 약속까지 해놓고 고다르는 나타나지 않는다. 집을 찾아가보니 그녀만이 읽을 수 있는 암호만을 남겨뒀다.「두아르느네에서, 해변을 따라…」「날 보면 자끄 생각이 난다는 거지만 재미도 없어요. (...) 좋아, 열기 싫다면 말라지. 가요」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고맙지 않지만, 그럼에도 고맙다며 고다르가 좋아했던 브리오슈 빵을 문에 걸어놓고 대답을 남기는 88세의 바르다. 어떤 감정에도 초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고다르를 탓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일렁인다. 아마 아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있겠지.「뒤얽혔다고 생각해요. 뒤얽혔어요」「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드려요?」JR은 그녀를 위해 자기 할머니를 만날 때도 벗지 않는 선글라스를 벗어 보인다. 그렇게 여전히 일렁일 수 있는, 순수한 그녀의 눈망울과 마주한다. 바르다는 자신의 영화를 위해 선글라스를 벗어주었던 고다르가 생각났을까.「호수 구경해요」


기록한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그렇다. JR과 바르다는 사랑을 행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JR과 바르다는 그 사랑의 행로에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난 사람들을 더욱 더 그들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만남엔 타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과 서로의 삶에 대한 인정이 오갔을 것이고, 그 짧디 짧은 만남을 선명히 기록하여 잊지 않고자 했다. 영화 속 사랑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랑을 느꼈다. 사랑이 윤리를 가능케한다. 진정한 사랑을 모른다고 하면서 하는 소리치곤 거창하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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