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이름이박힌책한권

가을을 보내는 비가 하루 종일 내린다.

by 허정구

가을을 보내는 비가 하루 종일 내린다. 꾸. 준. 히.

11월은 내 삶에 아주 중요한 날들이 많았다.

그사람을 처음 만났던 날도 11월이고

서울에서 떠나온 날도 11월이었다.


이제 이 비가 그치면 부는 바람엔 냉기가 조금씩 더 서려 있을 것이고

내일 아침 보이는 한라산 정상은 하얗게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참 많은 생각들을 하고

참 많은 기억들을 품고 산다.


생각만큼 품는 기억만큼 풍성한 하루하루를 보내지도 못하면서 꽤나 나이 들었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54이다.

단 한 번도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언제까지 살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지금은 일을 해야 할 텐데 이곳을 정리하면 뭘 할까 고민이 되고 막막하기는 하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는 혼자인 게 다행인 거 같다. 가진 게 없으니 늘 고맙게 여기며 산다.

사치라곤 부릴 여유가 없었으니 내가 먹고 싶은 하찮은 것들을 난 사 먹을 수 있고, 담배살 때 아직은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기도 한다.


다들 가지는 집도 내겐 너무 큰 욕심임을 알기에 그 어디던 방한칸이면 잠자고 씻을 수 있고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하고, 차도 적당히 잘 타고 다닐 수 있으면 족하다. 그것이 비록 오래된 중고차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차에 대해 모르기에 더 좋은 차가 다행히 부럽지 않다.


늘 꿈꾸고 희망하는 건 흔적 없이 홀연히 미련 없이 사라지는 소멸... 그 누구에게도 기억조차 남겨지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잊혀짐.


11월에 가을을 보내는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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