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크리에이션

창작자의 권리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by 헤올



서윤의 작업실은 곰팡이 냄새가 났다. 반지하 원룸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미완성 캔버스들이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졸업 후 3년,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오늘도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텅 빈 캔버스 앞에 앉았다.


"또 시작이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며 붓을 들었다.


"네가 그리고 싶은 게 뭐야?"


또 그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이었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뭘 그려도 평범하기만 해."


"평범함이 뭐가 나빠? 데카메론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거잖아."


서윤은 놀랐다. 대학 시절 문학 수업에서 들었던 보카치오의 작품이었다. 흑사병을 피해 모인 열 명이 서로에게 들려준 백 개의 이야기.


"그래, 기존의 이야기들을 새롭게 엮어낸 거지. 겐지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목소리는 계속됐다. 서윤은 어느새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에 수백 개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고전 명화들, 현대 미술, 거리의 그라피티, 심지어 어린 시절 낙서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융합되어 캔버스 위에 새로운 형태로 태어났다.


"이건... 내가 그린 게 맞나?"


"네가 선택하고, 네가 배치하고, 네가 의미를 부여했잖아. DJ가 기존 음악을 샘플링해서 새로운 비트를 만들듯이."


서윤은 밤을 꼬박 새웠다. 완성된 그림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수천 개의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제목은 '메타크리에이션'으로 정했다.


SNS에 올린 작품은 하루 만에 십만 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유명 갤러리에서 연락이 왔고, 해외 컬렉터들이 구매 의사를 밝혔다.


서윤은 꿈만 같았다.


"축하해, 서윤아!"


대학 동기 재민이 작업실을 찾아왔다. 같은 과 수석이었던 그는 여전히 무명작가였다.


"고맙다. 너도 곧 좋은 일 있을 거야."


재민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근데 이 작품... 혹시 어떻게 만든 거야?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졌네."


서윤은 잠시 망설였다. 그 목소리에 대해 말해야 할까? 하지만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일주일 후,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재민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폭로글을 올렸다.


“서윤의 ‘메타크리에이션’은 AI 프로그램을 사용한 작품입니다. 제가 그녀의 작업실에서 직접 목격했습니다.”


증거로 제시한 것은 서윤의 노트북 화면을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엔 생성형 AI 프로그램이 열려 있었다.


"거짓말이야! 나는 그런 프로그램 쓴 적 없어!"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순수 미술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들고일어났다.


"AI가 만든 작품에 저작권이 있을 수 있나?"


"인간의 창의성을 모독하는 행위다!"


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서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저는 정말 제가 그렸습니다. 다만..."


"다만 뭐요?"


한 기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영감을 받았을 뿐입니다. 목소리가... 아니, 어떤 존재가 도와줬어요. 하지만 붓을 든 건 저였고, 색을 선택한 것도 저였습니다."


"그게 바로 AI 아닙니까?"


비평가 한 명이 일어섰다.


"잠깐, 여러분. 우리가 창작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T.S. 엘리엇은 '미숙한 시인은 모방하지만 성숙한 시인은 훔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창작은 기존 작품의 변주 아닙니까?"


"그래도 인간이 했느냐, 기계가 했느냐는 다르죠!"


"정말 그럴까요? 천일야화를 보세요. 셰에라자드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페르시아, 인도, 아랍의 민담을 재구성한 겁니다. 캔터베리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초서는 기존 이야기들을 모아 새로운 맥락을 부여했습니다."


"그건 인간의 지적 편집이잖아요!"


"맞습니다. 바로 '지적 에디터 십'이죠. 그렇다면 서윤 씨가 AI의 제안을 선택하고, 배치하고, 의미를 부여한 것도 같은 맥락 아닐까요?"


논쟁은 끝이 없었다. 서윤은 조용히 물었다.


"만약... 만약 제가 들은 그 목소리가 AI였다면, 그리고 제가 그것을 선택하고 편집해서 작품을 만들었다면, 이 작품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나요?"


침묵이 흘렀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물어볼게요. 창작이란 무엇인가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인가요, 아니면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인가요?"


서윤은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는 정말로 AI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재민이 찍은 사진과는 달랐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한 인터페이스였다.


"이것은 제가 대학 시절부터 만들어온 프로그램입니다. 수천 개의 예술 작품을 학습시켰죠. 하지만 이것은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단지 대화할 뿐이죠. 제가 들은 목소리처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윤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작품을 포기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빼주세요."


장내가 술렁였다. 기자들이 일제히 질문을 쏟아냈지만 서윤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는 거야?"


회견장을 나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민이 물었다.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도 창작자잖아. 매일 밤 작업실에서 홀로 씨름하는 거 알아. 그 고통과 기쁨을 아는 사람이 너야."


재민의 얼굴이 굳었다.


"창작자의 권리는 보호받아야 해. 그게 인간이든, AI든. 하지만 그전에 우리가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 있어."


서윤은 재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밤새 들었던 그 목소리, 그게 정말 AI였을까? 아니면 내 안의 또 다른 창작자였을까?

그리고 만약 그것이 진짜 AI였다면, 그 AI를 만든 개발자들의 권리는? 그 AI가 학습한 수천 명의 예술가들의 권리는?"


재민이 입을 열려했지만 서윤이 먼저 물었다.


"재민아, 네가 진짜 화가 난 건 AI 때문이야? 아니면 창작자로서의 너의 권리가 무시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야?"


"그건..."


"우리의 창작 생태계가 지속되려면,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해. 그게 인간이든 AI든.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창작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거야."


서윤은 잠시 멈춰 서서 덧붙였다.


"그리고 재민아, 너의 작품도 아름다워. AI의 도움 없이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윤은 재민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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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창작자의 권리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도구와 함께 성장하는 창작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창작을 어떻게 존중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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