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26살의 치열했던 인턴 기록 - 02
사람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무엇일까? 일이 많은거? 친구들과 싸운거? 여자 친구랑 헤어진거?
물론 여자 친구랑 헤어진거는 슬프고 심적으로 힘들다...ㅎㅎ 하지만 많은 힘든 순간 속에서 가장 힘든 것은 '내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면 될 줄 알았던 나에게 "아 최선을 다해도 나는 안되나 보다"라고 존재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진 순간이 있었다.
인턴 때 나는 데이터 분석을 하는 팀에 배정받았다. 멘토님과 상의 끝에, 개인 과제로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데이터 지도를 그리는 과제를 하였고, 그룹 과제는 블록체인을 활용한 기획을 하였다. 나중에 입사하고 보니 이 데이터 지도는 회사에서도 오랫동안 고민을 가지고 있는 과제였다. 인턴의 시각에서 한 번 아이디어를 내서 해보라고 과제를 주셨다. 나 역시도 그래도 데이터 분석을 해보았길래, 이 과제가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데이터 분석은 내 길이 아니다"라고 다짐했는데, 또 이 팀에 배정받다니 역시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긴 하다.
사실 말이 오후 5시까지만 근무였지, 집에 와서 다시 저녁 먹고 카페 가는 게 일상이었다. 자료 반출이 안되었기에, 주로 카페에선 자료를 찾아보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다음날 회사에서는 그 아이디어를 적용하는데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초반엔 주말에는 친구들도 만나면서 놀았지만, 발표 한 2주 전부터는 매일 새벽에 잠들었고, 주말에도 계속 과제를 했다. 그룹 과제가 빈약할 때는 인턴 친구들끼리 시간을 내서 만나기도 하였다. 굳이 이렇게까진 할 필요는 없지만, 대부분 우리 회사 인턴이 이런 시간을 겪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최종 발표 전 주 목요일,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원래 8월 17일, 목요일이 최종 발표였는데, 이사님이신 기획실장님이 갑자기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가게 되면서, 발표 날이 8월 14일, 월요일로 변경이 된 것이다. 인턴 친구들 모두 아직 할게 많았고, 3일의 시간은 엄청난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3일의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 갑작스레 8월 11일 날 팀 주간회의에서 최종 점검을 하였다. 이미 중간 점검에서 한 번 박살 나고, 피드백받은 내용을 새벽까지 고민해가며 다 보완했기 때문에, 최종 점검 때 자신이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열심히 했어"라고 생각하며 발표를 하였다.
최종 점검 결과는 정말 처참했다. 이날 한두 시간 정도 피드백을 받았는데, 내 생에 PPT와 발표 가지고 그렇게 많은 피드백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발표가 왜 이렇게 자신이 없냐?", "말은 왜 이렇게 느리냐?", "PPT에 글은 왜 이렇게 많냐?", "문장이 왜 이렇게 길어", "슬라이드마다 핵심이 뭔지 모르겠다", "결론이 뭔지 모르겠다", "임팩트가 없다" 등 정말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왔다. (이렇게 말하면 인턴팀이 안 좋아 보이는데, 사실 인턴 때 팀원 분들은 정말 좋으신 분들이었다. 주변 팀에서도 '정치질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하게 일만 하는 좋은 팀'이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이 피드백이 월요일 최종 발표 전, 전주 금요일에 들었던 내용이다. 나에겐 토요일, 일요일밖에 시간이 없었다.
점검이 끝나고 멘토님이랑 따로 시간을 가졌는데, 멘토님께서도 맥이 풀리면서 "홍홍 씨가 이걸 다 할 수는 힘드니, 정말 중요한 것만 해서 최종 발표를 해요. 고생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약간 포기하신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멘토님이랑 친한 팀원 한분도 나에게 아쉬운 말들을 했다. "홍홍 씨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면서 준비했는데, 너무 준비한 거를 다 못 보여준 거 아니에요? 정말 내가 다 아쉬워요. 나라면 이 부분은 이렇게 말했을 것 같은데..." 두 분 다 내가 질문할 때마다 정말 친절히 알려주셨고, 나의 안 좋은 습관까지 다 파악하고 말씀하시면서 도와주셨던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었다.
정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사람이 정말 힘든 순간이 언제냐면, '내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을 때'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때 좋은 결과가 나온 경험이 있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 정도면 정말 최선을 다했고,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그때 그 순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결과를 받으니 '나는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모든 자신감과 자존감이 떨어져 버렸다.
그날 머리가 아픈 채로 지하철을 타러 갔다. 나 빼고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머리가 아픈 채로, 그때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 술을 엄청나게 먹었다. 찌질하게 온갖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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