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준비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 내 삶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 위한 배낭을 쌀 때 항상 나오는 말이다. 삶의 무게를 줄이는 것. 한 달 동안 걷는 길이기에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해야 한다. 하지만 또 10kg이 넘어버렸다. 인터넷이나 책에서는 자기 체중의 1/10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는데... 7~8kg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줄여도 줄여도 저 정도가 안되었다. 짐 싸 보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생각보다 별거 안 넣었는데도 무게가 나간다... (간혹 가다 5kg까지 줄였다는 분도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한 거지??ㅎㅎ)
결국 12.9kg까지 나왔다. "내 삶의 무게가 13kg이니깐 내가 감당하고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세면도구도 다 새거니 쓰다 보면 무게가 줄어들 터였다. 3년 전 다이어리를 뒤지다 보니 저런 유물도 나왔다. 저렇게 썼는지 기억이 안 났는데 오랜만에 보니깐 신기했다. 첫 파리 여행부터 순례길 끝나고 스페인 남부를 도는 것까지 일정을 저렇게 짰었구나. 감회가 새록새록하다ㅎㅎ
그렇게 모든 일을 제쳐두고 순례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기까진 6개월의 시간이 흘렀지만, 준비하는 데는 2주가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 세상도 그러지 않을까? 중요한 길목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기까진 항상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자 있을 때, 고민을 하면서도 누군가 함께 있을 때는 또 금방 잊어버리는 것. 그렇게 마음 한 켠에 선택을 남겨두고 살아간다. 하지만 결심한 순간, 행동이 생각을 앞지르게 된다. 주변에서는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하지만, 오히려 현실에서는 행동을 먼저 하면 걱정할 틈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기에 일단 행동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순례길을 걷는데 필요한 필수 준비물은 대략
배낭, 등산화(트래킹화), 침낭, 우비, 슬리퍼, 세면도구, 선크림 2개, 빨래집게, 손톱깎이, 선글라스, 의류(위아래 각각 2벌), 등산용 양말, 바람막이 (또는 경량 패딩), 상비약, 등산스틱, 세제, 목 부분도 가릴 수 있는 모자, 속옷, 귀마개, 배드버그 약, 스포츠 타월, 멀티탭, 배낭 커버, 도난 방지용 자물쇠, 시계, 옷핀, 보조배터리, 랜턴, 숟가락, 젓가락, 손수건, 읽을만한 책 등이다. (인터넷에 관련 자료가 많으니 더 찾아보시면 됩니다.)
이 중 별거 아닐 거 같지만 순례길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목까지 다 가리는 모자
매우 햇빛이 쌔다. 밀짚모자 안된다. 목이랑 볼까지 다 가릴 수 있는 모자여야 한다. 도저히 못 구하면 주변을 손수건을 둘러서라도 다 가려야 한다.(대부분 그렇게 다닌다.)
2. 랜턴
랜턴은 무조건 필수이다.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는 보통 9~10시면 불이 꺼지고 순례자들이 새벽 5시 정도엔 일어나서 나가기 때문에 어두운 환경이다. 이때 휴대용 랜턴으로 짐을 정리한다. 특히 공립 알베르게는 대부분 1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불을 킬 수가 없다. 작은 랜턴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
3. 빨래집게
순례자들은 매일 걷고 나서 빨래를 한다. 빨래집게는 많을수록 좋다. 다행인 것은 많은 순례자들이 삶의 무게를 버리기 위해 빨래집게를 놓고 간다. 그런 빨래집게 몇 개 쓰면 된다. 건조하고 햇볕이 강해서 보통 그날 빨래하면 그날 마른다.
4. 옷핀
늦게 숙소에 도착해 빨래를 하거나 비가 오면 옷이 다 안 마르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대부분 순레자들이 걸으면서 속옷, 양말 등을 말린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옷핀이다. 양말과 속옷을 옷핀에 끼워서 가방 뒤에 달고 다니면 된다. 그러면 한두 시간 있다가 마른다. 대다수의 순례자들이 그렇게 걷고 있고, 나 역시도 거의 매일 가방 뒤에 옷을 말리고 다녔다.
5. 귀마개
100명이 넘는 공립 알베르게에 어떤 복병이 있을지 모른다. 코 고는 소리가 크면 잘 못 잔다. 귀마개는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여러 개를 준비하자.
6. 경량 패딩(또는 바람막이) 그리고 경량 침낭
스페인 북부는 낮에는 덥지만 밤에는 춥다. 나의 경우엔 5월에 눈이 내린 적도 있었고, 아침에 걸을 때 영하로 떨어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리고 알베르게에는 이불이 따로 없어 침낭 안에 들어가서 자야 한다. 두꺼우면 배낭 무게가 많이 나가니 경량으로 꼭 준비하자.
7. 우비
우비는 이왕이면 좋은 거 샀으면 한다. 같이 다닌 분들 중에 비닐로 된 우비를 가져왔는데 약해서 대부분 찢어졌다. 유럽에 있는 스포츠 샵에 값싸고 질 좋은 우비가 많으니 이왕이면 안 찢어지는 걸로 하나 사자!
8. 멀티탭
멀티탭 하나 있으면 최소 3명 이상이 편하게 쓸 수 있다. 굳이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좀 같이 써도 되냐고 막 물어본다ㅎㅎ. "다른 사람이 빌려주겠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 정도는 챙기면 좋다.
9. 등산 스틱
등산 스틱은 두 개의 발이라 생각하면 된다. 내 두 발이 힘들 때 등산스틱이 배낭과 몸의 무게를 분산시켜준다. 쓰는 법을 확실히 알면 그 위대함을 알게 된다. 다만 등산스틱은 비행기에 갖고 탈 수 있는지는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저가항공은 안 되는 경우도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유럽에서 다 살 수 있으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10. 커피 스틱
커피 스틱 몇 개 챙겨가면 사람들이 정말 좋아한다. 순례길에선 거의 레어템 수준이다. 20개인가 챙겨갔는데 같이 걸었던 사람들이랑 며칠 만에 다 먹었다ㅋㅋㅋㅋ 그래도 챙겨가면 이쁨 받을 수 있으니 한 번 챙겨가는 것도 괜찮다.
위에 준비물 중 침낭, 우비, 등산 스틱은 이왕이면 유럽 가서 사는 걸 추천한다. 파리에 큰 스포츠 매장이 있고 가격도 싸다. 침낭, 등산 스틱은 가벼워서 좋았고, 우비는 10유로 정도 했지만 질이 좋아 순례길 도중 정말 알차게 썼다. 내 기억으론 침낭이랑 등산 스틱이 우비보다 더 쌌던 걸로 기억한다.
마지막에 집에서 라면도 안 챙겨 간다고 한바탕 해서 결국 라면도 몇 개 넣었다. 항상 여행에서 나의 변변치 못한 끼니를 걱정하시는 부모님...ㅎㅎ. 그렇게 18년 4월 17일 나는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