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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Aug 02. 2019

현실에도 슈퍼윙스가 필요하다?

첫째와 애니메이션 보다가 급 슬퍼진 썰

수요일 저녁, 밥을 먹고 쉬려는데 그날따라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가 눈에 거슬렸다.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둘째는 일찌감치 잠이 들어 있었고, 아내는 운동을 하러 잠시 외출을 한 상황. 내가 설거지를 하러 가면 첫째가 혼자 남게 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잠시 망설여졌다. (보통은 첫째와 놀아주는 걸 택하고 설거지를 잠시 미뤄둔다.)


집안일을 할 때 가끔 알아서 혼자 놀기도 하는 첫째라 "아빠 설거지하고 올 테니 혼자 놀고 있어"라고 말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뭔가 안쓰러웠다. 이럴 때 사용하는 게 TV찬스다. 너무 남발하면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적절히 활용하면 21세기를 살아가는 부모의 지혜로운 육아법이 될 거라고 합리화를 하며 리모컨을 들곤 한다.


이미지 출처 : EBS홈페이지

첫째는 최근 <슈퍼윙스>에 빠져있다. 풀네임은 <출동! 슈퍼윙스>인데, '호기'라는 이름의 빨간 비행기가 전 세계 어린이들이 주문한 택배를 배달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재미있는 스토리와 함께 각 나라의 문화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이 애니메이션의 관전 포인트.


첫째에게 보여준 적 없는 에피소드는 뭘까 찾아보다가 '아시아 편'을 발견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이웃 국가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지 나부터 호기심이 생겼다. 한 편만 같이 봐야지, 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가장 먼저 나온 건 '한국 편'이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 그려진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됐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이마를 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서였다.


탄식을 내뱉는 나를 보고, 첫째가 물었다.


"아빠, 왜 그래?"

"아, 그냥... 뭔가 좀 슬퍼서~"


첫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TV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안타깝게 여겼던 장면은 혜미라는 한국 아이가 호기에게 택배를 받아 열어보는 부분이었다. 택배 상자에 들어있던 건 다름 아닌 시간표다. 혜미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혜미 : 한국 어린이들은 할 일이 많아서 시간표를 갖고 다니곤 하거든. (시간표를 손으로 하나씩 짚으며) 수학교실, 발레, 태권도, 줄넘기!

호기 : 우와 배우는 게 정말 많구나!

혜미: 친구들도 나도 배우는 게 많아. 하지만 재미있어!


딱 봐도 뼈 때리는 대사가 아닌가! '한국 어린이들은 할 일이 많아서'라니. 그걸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해맑은 표정으로 말하니 가슴 한 편이 더욱 찌릿했다. 더구나 <슈퍼윙스>는 중국과 미국에서도 방송되는 애니메이션이라는데, 하필 우리나라의 저런 현실을 다뤘어야만 했는지 씁쓸했다. 이어지는 내용 또한 그랬다.


혜미의 시간표 가장 마지막 순서에는 '가족들과의 외식'이 있었다. 혜미는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그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우편배달부로 일하는 혜미 아빠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배달해야 할 택배와 편지가 많이 남아서 가기 힘들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혜미는 "할 수 없죠." 하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우리의(?) 슈퍼윙스가 도와주기로 한다.


호기 : 좋은 생각이 있어! 내가 대신 너희 아빠 우편물을 배달할게. 그럼 아빠는 오실 수 있잖아!

혜미 : 정말 그래 줄래? 꼭 온 가족이 모였으면 했거든. 아빠가 오셨으면 좋겠어!

호기 : 슈퍼윙스를 부르는 게 좋겠어요!

혜미 엄마 : 슈퍼윙스...?

호기 :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오는 멋진 비행기 친구들이죠. 본부! 나와라!

코보 아저씨 : 여기는 본부! 무슨 일이지?

호기 : 지금 한국인데요. 혜미 아빠가 가족들과 식사할 수 있게 돕고 싶어요.

코보 아저씨 : 그럼 슈퍼윙스를 보내주마. 아리! 한국으로 출동해서 혜미 가족이 다 같이 식사할 수 있게 도와줘!

아리 : 좋아요! 가족이 모이는 건 중요하니까요~ 아리 출동!


'가족과의 식사'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해 보이는 일이 슈퍼윙스가 출동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던가. 이 에피소드가 한국을 배경으로 하게 된 것이 '우연'이었다 할지라도, 한국에서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내 눈에는 단순히 만화 속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았다.


나의 경우만 생각해봐도 그랬다. 회사 일 때문에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해야 했던 적이 많았다. 녹화 시간이 저녁에 잡히거나 편집 등 후반 작업이 길어지면 밤늦게, 혹은 새벽에 동이 틀 때쯤 퇴근하기도 했다. 가족과의 저녁 식사는 고사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집에 머무는 시간 자체가 별로 없었다.


이런 가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직장인들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최근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됐고 제도가 안착했다는 평가나오지만, 한편으로는 그건 대기업에 국한된 얘기일 뿐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여전히 초과근무에 시달리고 있고, 제도 시행 대상이 되는 내년에도 가혹한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4415780

현실 속에도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우리 일을 덜어주는 '슈퍼윙스'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슈퍼윙스'가 나설만한 일이 없도록, 열악한 업무 환경이 빨리 개선되는 편이 더 좋겠다.




한국에서의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나왔던 혜미의 대사가 계속 귓가를 맴돈다.


혜미 : 오늘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전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호기, 아리! 온 가족이 모이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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