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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May 11. 2020

다섯 살 딸이 아빠의 시작을 응원하는 방법

매일 오전 9시. 우리 집엔 사뭇 진지한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 둘 있는 집 같지 않게 조용하다. 틈만 나면 나에게 매달리려 하는 둘째도 이 시간만큼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책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거울 앞에 앉은 첫째도 장난기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기다려준다. 떼를 쓰거나 보채는 법이 없다. 그럴수록 나는 애가 탄다. 빨리 해야 하는데. 더 잘해야 하는데.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른다.


잠시 후, 참아왔던 숨을 크게 한번 내쉰다. 완벽하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거울 속에 비친 첫째를 바라본다. 앞머리가 지저분하게 이마를 덮고 있다. 어쩔 줄 몰라 방황하게 되는 그때, 아이가 심사숙고해 고른 머리핀 하나를 나에게 건넨다.


"아빠, 이거 이거!"


그날의 의상에 어울리는 머리핀을 꽂아 앞머리를 고정함으로써 10여 분 간의 대장정이 비로소 마무리된다. 아이 머리를 묶어주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오늘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처럼 나는 홀가분해진다.




머리를 묶는 행위만큼 남자들이 낯설어하는 것이 있을까. 더군다나 내 머리도 아니고 다른 사람 머리를 말이다. 그러나 육아휴직을 한 순간, 딸 가진 아빠인 나에게 '머리 묶기'는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남자 입장에서 머리를 묶는 일은 필요하지도 않고 매우 귀찮은 일이다. 이렇게 묶으나 저렇게 묶으나 똑같아 보인다. 그래서 육아휴직을 앞두고 있을 땐 아이 머리도 그냥 대충 쓸어 넘겨 고무줄로 한 번 묶어준 뒤 어린이집에 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준비를 혼자 시켜 보니, 머리를 대충 묶어 보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빠가 육아휴직했다더니, 티가 나네~"라는 식의 이야기를 아이가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 아이의 경우 그 '티가 나는' 대표적인 포인트가 머리 모양이기 때문에, 이것 만큼은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30년 넘게 해보지 않은 일을 단번에 잘 해낼 리 없다. 분명 전날 밤 아내가 머리 묶는 스킬 하나를 전수해줬건만, 왜 내 손은 말을 안 듣는지. 끙끙대며 아이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지다가 포기하기 일쑤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양갈래로 묶어주기'를 택하는 날이 많다.


육아휴직 약 3개월 경과. 지금까지의 내 실력으로 봐선 육아휴직이 끝날 때까지 얼마나 다양한 스킬을 연마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요리할 수 있는 메뉴를 하나하나 늘려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아이 머리를 묶어주는 일은 잘 해낼 자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아침이 되면, 나는 또 아이 머리를 붙들고 씨름을 할 것이다. 대충 묶어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서툴더라도 아빠가 묶어준 머리라면 무조건 좋아해 주는 첫째 덕이 크다.




지난 2월 중순, 야심 차게 육아휴직을 시작했던 날의 일이다. 첫날이니 만큼 심혈을 기울여 아이 머리를 만져주었다. 양갈래로 머리를 가른 뒤 각각 고무줄로 묶고, 머리가 지저분해 보이지 않도록 그 아래로 두 번씩 더 묶었다.


아이 머리를 혼자 이렇게 묶어준 것이 처음이었던 터라 서툰 부분이 많았다. 가르마는 삐뚤빼뚤했고 잔머리도 이곳저곳 삐져나온 곳이 많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헝클어지면 선생님께서 다시 단정하게 묶어주시겠지, 생각하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날 오후 네 시경.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머리가 아침에 묶어준 것 그대로였다. 보통은 아이가 낮잠을 자고 나면 머리가 풀어져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다시 묶어주시곤 한다. 살짝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선생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


"아까 낮잠 자고 일어나서 '머리 다시 묶어줄까?' 하고 물어봤는데, '아빠가 해준 거예요.' 라면서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말을 했던 첫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짐작해보았다. 아이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내 결론을 이랬다.


'내가 묶어준 머리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랬다기 보다, 그런 식으로 아빠의 시작을 응원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딸의 응원은 아빠도 춤추게 하는 법이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일부터 또 열심히 머리를 묶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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