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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Jun 10. 2020

"괜찮아"라는 아이의 말이 나는 괜찮지 않았다

첫째는 어린이집에서 하원 하면 꼭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가고 싶어 한다. 어린이집에서 나오자마자 나에게 건네는 첫마디가 "아빠! 나 놀이터 갈래!"일 정도로 밖에서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첫째다.


하루 종일 어린이집 안에서 답답하게 생활했을 아이를 뛰어놀 수 있게 해 준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고, 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첫째의 그 말이 달갑지 않다.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는 건 하루 중 가장 긴장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놀이터에 가면 나는 진심으로 내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 첫째는 가는 곳마다 "아빠! 아빠!"를 불러대고, 둘째는 미끄럼틀에 꽂혀 겁도 없이 높은 계단을 오른다.


걸음마를 완벽하게 뗀 둘째지만 야외에서 걷거나 뛰는 데는 아직 미숙해서 넘어지는 일이 많다. 더군다나 대여섯 살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에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놀이터에서 만큼은 첫째보다 둘째를 더 챙기는 이유다.  


이때 놀이터에 첫째와 같은 반 친구들이 몇몇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봐주지 않아도 친구들과 알아서 잘 논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다. 몸은 둘째를 쫓아다니지만 저 멀리 혼자 남겨진 첫째를 힐끔힐끔 쳐다보게 된다.


심심해하지는 않을까. 외로워하지는 않을까. 둘째를 미워하는 건 아닐까. 다른 친구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는 건 아닐까.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머릿속은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처음엔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 가는 게 몸이 힘든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심적 부담, 스트레스가 정말 큰 일이었다.


며칠 전에 집에서 짜증이 폭발했던 일이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첫째는 그네를 타고 싶다고 했다. 두 자리뿐인 그네 중 하나에 자리가 나자 쏜살 같이 달려가 앉았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아빠, 밀어줘!"


나는 곧장 첫째에게 갈 수 없었다. 미끄럼틀만 보면 직진하는 둘째를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라고 답해주었지만, 사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첫째는 다시 한번 나를 찾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 칭얼거리고 있다는 . 그 와중에 둘째는 속도 모르고 가장 높은 미끄럼틀을 향해 타박타박 걸어갔다.


아, 저기 위험한데. 저러다 다치는데. 둘째에게 얼른 내려오라고 다그쳤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둘째는 계속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장난을 쳤다. 감정이 확 올라왔다.


첫째의 두 번째 외침에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스크 위로 간신히 보이는 첫째의 두 눈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네는 멈춰있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아주 조금 흔들릴 뿐이었다.


그날 나는 결국 첫째의 그네를 밀어주지 못했다. 높은 곳에 올라간 둘째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첫째는 나를 기다리다 그네에서 내려왔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첫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아빠가 오늘 동생 보느라고 그네 못 밀어줬네."

"괜찮아~ 나 그냥 어떤 언니가 그네 타고 싶어 해서 양보해준 거야."


내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던 걸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첫째는 쿨내 풀풀 풍기며 괜찮다고 이야기한 뒤, 아무렇지 않게 킥보드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향했다.


아이가 괜찮다고 했으니 나도 괜찮아야 하는데, 전혀 괜찮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네에서 내려오던 순간엔 찮지 않았을 게 분명했으니까.


잔뜩 투정을 부렸어도 이해할 수 있었던 날이었는데 오히려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라는 듯 말을 하다니. 나는 더 미안해졌다. 그날따라 미끄럼틀에 더 집착던 둘째는 괜히 얄미워 보였다.


사실 여기서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첫째는 그네가 타고 싶었을 뿐이고, 둘째는 미끄럼틀이 타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몸이 두 개가 될 수 없으니 당연히 좀 더 보호가 필요한 둘째 옆에 있었을 뿐이다.


답답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다 싫다고 느껴질 정도로. 내 생애 손에 꼽을 만큼 감정이 바닥을 쳤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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