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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Aug 20. 2020

자가격리는 처음이라...

자가격리 일지 - 1일 차 (2)

1.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내에게 온라인으로 장을 좀 봐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당장 며칠은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2주를 버티려면 몇 가지 식재료와 아이들 간식거리는 더 사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2. 아내는 내 얘기를 듣고 곧 스마트폰을 손에 들었는데 영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첫째의 코로나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돼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거기다 입맛이 없다며 아침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기운이 없을 만했다. 그렇게 오전 내내 축 쳐져 있던 아내는 둘째 낮잠 시간에 둘째와 함께 잠들었고, 그제야 체력을 조금 회복했다.


3. 오전 10시쯤 어린이집 단톡방에 아이들의 코로나 검사 결과가 하나둘 씩 공유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양성 판정을 받은 아이는 없었다. 일단 안심이었다. 곧이어 단톡방에는 자가격리 대상자 및 가족·동거인 생활수칙 등이 공유되었다. 하나같이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집에서는 지키기 힘든 것들이었다.


4.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가격리 대상자를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생활'하게 하고, '가족 또는 동거인과 대화 등 접촉'하지 않게 하는 거였다. 도저히 불가능.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망연자실한 채로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중간중간 보건소 등 관련 기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내가 첫째를 돌보는 걸로 등록이 되어 있어 안내 전화는 아내가 맡아서 받았다. 내용은 앞으로의 자가격리 기간 동안 알아야 할 사항에 관한 것이었다.   


5. 첫째가 자가격리 대상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장인어른 장모님께서는 즉각 우리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 주셨다. 당장 아이들 먹일 반찬은 있는지, 또 다른 필요한 것들은 없는지 물어오셨다. 일단 우리가 경황이 없을 테니 간편하게 점심 한 끼를 때울 수 있도록 근처 시장에서 김밥 몇 줄과 떡볶이를 사다 주시겠다고 했다.


6. 11시 30분쯤 현관문을 조심스레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면을 할 수 없으니 음식을 문 앞에 두시고는 우리에게 가지고 들어가라고 신호를 주신 거였다. 왜 초인종을 누르지 않으셨을까 잠시 의아했는데 금세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면 아이들은 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놀러 오신 줄 알고 기뻐하며 버선발로 뛰어나갈 것이었다. 그걸 너무나 잘 아시기에 아내와 나만 눈치챌 수 있도록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가신 거였다. 하... 순식간에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없는 사이게 돼버리다니. 이번 코로나 확산 사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향해 또 한 번 실컷 욕을 퍼부었다.


7. 몇 시쯤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오후 네 시 정도였던 것 같다. 아내가 별안간 현관문을 열어 문 앞에 뭐가 왔는지 확인을 하러 나갔다. "응? 생수가 와있네?" 하며 2리터 생수 6병씩 두 묶음을 낑낑거리며 집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자가격리 대상자에게 주는 보급품이었다.


알고 보니 생수 외에도 자가격리 대상자에게 지원해주는 것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가 이런 건 또 잘 돼있네" 하며 잠시나마 위안을 받았다.  


8. 하루 종일 체력 넘치는 아이들과 있다 보니 아내와 나는 기가 빨려 금세 지쳤다. 아이들에게 TV 보여주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평소 아이들이 TV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한 시간에서 길어야 한 시간 반 정도였는데 두세 시간이 되었다. 마음이 쓰였지만 그렇게라도 쉬어야 했다.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에라, 모르겠다. 보고 싶은 거 다 보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하며 고삐를 풀게 되는 것 같다.


9. 저녁으로 먹을 게 없어서 요리를 해야 했다. 최근 장모님 신세를 많이 져서 주방에서 칼을 잡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육아휴직 초기 요리에 열중해 익숙해졌던 터라 오랜만에 하는 요리가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10. 먼저 소불고기를 준비했다. 냉동실에 있던 불고기용 소고기를 녹여 간장 양념에 재우고, 갖은 채소들은 썰어서 따로 준비해두었다.


11. 국은 어떤 걸 끓일까 생각하다가 얼마 전 장모님께서 주고 가신 시금치가 떠올랐다. 많이 시들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냉장고 야채칸을 열어 확인해보니 꽤 파릇파릇했다. 된장 한 숟갈을 푼 물에다 넣고 끓여 시금치 된장국을 만들었다.


12. 아이들도 앞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니 밥을 맛있게 잘 먹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애들은 역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첫째는 다그치지 않으면 스스로 숟가락을 잘 들지 않았고 둘째는 몇 번 밥을 받아먹고는 의자에서 내려와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10일을 더 보내야 한다고?...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그날이 올 때까지 부디 첫째에게서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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