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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Aug 24. 2020

긴박했던 오후

자가격리 일지 - 2일 차

자가격리 이후의 일상을 매일 써보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을 두 아이와 24시간을 꼼짝없이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아이들과 함께 잠들었다가 비슷한 시각에 눈을 뜨는 날이 반복됐다.


7일 차를 앞둔 지금 이 순간에도 졸린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밀린 일기를 쓰는 느낌이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기록해두고 싶었다. 비록 하루하루 비슷하게 반복된 일상이었지만,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고 심리적으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돌아보고 기억하는 데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 8월 19일 (수) - 자가격리 2일 차


1. 아침에 일어나니 전날 새벽 배송으로 주문한 음식들이 도착해 있었다. 먼저 잠에서 깬 아내가 포장을 뜯어 냉장고 안에 정리해 둔 상태였다. 


2. 그중에는 식빵과 우유가 있었는데, 이날 아침은 그걸로 해결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밥 아닌 걸 아침 식사로 주지 않으려는 편이지만, 가정보육이 장기전으로 돌입한 만큼 예외를 두기로 한 거였다. 


3. 식빵에 잼을 발라주면 그렇게 좋아하던 첫째였는데 이날은 입맛이 없었는지 맛있게 먹지 않았다. 내 기분 탓이었는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이틀 전 받았던 코로나 검사의 영향이었던 걸까. 아침 식사 후 오전 시간을 보내기 위해 꺼내 준 찰흙 장난감을 앞에 두고서도 첫째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4. 11시 반쯤 장모님께서 먹을 걸 한 보따리 챙겨서 문 앞에 두고 가셨다. 쇼핑백에 담겨 있었는데 꽤 묵직했다. 식탁으로 가져와 하나하나 풀어보는데, 아내는 그걸 지켜보다 눈물을 흘렸다. 누가 봐도 정성 가득한 반찬들이, 그것도 몇 통씩 정갈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란말이, 고깃국, 호박죽, 그리고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동치미 국물도 한가득이었다. 장모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음식들을 준비하셨을지 생각하니 나도 덩달아 코 끝이 찡해졌다. 동시에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건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5. 오후 3시쯤, 보건당국에서 보내준다던 위생 키트가 도착했다. 자가격리 대상자에게 지급되는 물품이었는데 손 소독제, 살균 스프레이, 마스크, 쓰레기봉투 등이 들어 있었다. 얇은 종이로 된 체온계도 있었는데 전자식이 아니라서 어떻게 체온을 표시해준다는 건지 궁금했다. 


6. TV를 보고 있던 첫째의 체온을 재보았다. 37도와 38도 사이라는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어떤지는 알기 어려웠다. 집에 있던 체온계로 다시 측정해보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체온이 38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이의 이마와 목덜미를 짚어 보니 열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7. 이번엔 낮잠에 든 둘째를 제외하고 아내와 내 체온을 측정했다. 우리는 정상 체온이었다. 첫째 체온을 거듭 다시 재보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평소 같았으면 일시적인 미열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8. 일단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다시 체온을 쟀다. 열이 내리긴 했지만 정상 체온 수준은 아니었다. 점점 초조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계속 불안해하느니 보건소에 문의하는 게 낫다 싶어 통화를 시도했다. 그쪽도 정신이 없는지 단번에 연결되지 않았다. 서너 번 만에 겨우 우리 상황을 전달할 수 있었다. 


9. 보건소 측에서는 내 얘기를 듣더니 혹시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였는지, 다른 증상은 없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아니라고 답했고, 보건소 직원은 코로나 검사를 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재검을 받지는 않아도 된다며 안심시켜주었다.


10. 잠시 후 상황을 전달받은 담당 공무원이 우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좀 더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결론은 해열제를 먹이고 좀 더 지켜보라는 거였다. 첫째에게 곧장 해열제를 먹였고 다행히 체온은 평소 수준을 회복했다. 일단 안심이었다.


11. 하지만 아내도 나도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 밥은 먹여야 하니 정신 차리고 전날 재워둔 불고기를 서둘러 구웠다. 첫째와 둘째 밥을 다 주고 나서야 뭔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나는 몇 시간 사이 확 긴장하고 마음 썼던 게 억울하고, 또 격리되어 있는 이 현실이 너무나 분해서 억지로라도 맛있는 걸 시켜 먹자고 뜻을 모았다. '이 시국에 우리가 배달 음식을...?'이라며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먹는 걸로라도 분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우리는 치킨을 시켜 먹었다. 시국이 이래도 치킨은 맛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자가격리 일지 - 1일 차]

https://brunch.co.kr/@heopd/161

https://brunch.co.kr/@heopd/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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