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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Dec 19. 2018

'일기 쓰기'에 대한 편견

'일기'하면 단연 초등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방학 숙제들 중 최고 난이도였던 일기 쓰기. 매일매일 쓰기 귀찮아서 한껏 미뤄놨다가 개학하기 직전에 쓰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일기장을 글로 채우는 일은 항상 머리를 쥐어짜야만 겨우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쓰고도, 담임 선생님 외 다른 사람에게는 최대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쓰는 것이 일기인지라 사실 별 내용 아닌데도, 괜히 남들 보기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사생활과 함께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은 30대 중반이 되었지만, '일기'라는 단어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나는 몇 달 전부터 온라인 플랫폼에 글을 써왔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시작해 브런치에 이르기까지, 틈틈이 글을 썼다. 대부분 '육아'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는 내가 쓴 글이 '일기'로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사람들이 내 일기를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뭐라고.


그래서 글의 주제를, 그나마 이야깃거리가 될만한 '아빠의 육아'로 좁혔던 것이었고, 글 안에 어떤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슬슬 글을 쓰는 게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가지 주제 아래 매번 다른 메시지를 담은 글을 쓴다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래도 일기처럼은 쓰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다 보니, 일상 속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글을 잘 쓰지 않게 됐다.


글을 많이, 잘 쓰고 싶은데,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블로그에는 책이나 영화 리뷰도 간간이 썼지만, 늘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글 양을 늘리는 데 의미를 두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살짝 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밥보다 일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뭔가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밥보다 일기>는 기생충학자로 유명한 서민 교수의 신간으로 우리가 왜 매일 일기를 써야하는지, 또 어떻게 하면 일기를 잘 쓸 수 있고,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기'에 대한 생각이 점점 바뀌어가는 걸 느꼈다. 신기한 일이다. 책 한 권으로 생각이 달라지다니.



"영화 이야기라고 해서 꼭 영화 줄거리와 그에 대한 느낌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인상 깊게 느낀 얘기는 뭐든지 좋습니다." (p.118)


"뭐든지 쓰세요. 영화와 관련이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뭐든지 쓰면 됩니다. 그게 바로, 일기입니다." (p.119)


"싸움이 없을 때는 쓸 말이 없어서 못 쓰고, 싸울 때는 바빠서 못 쓰고, 이순신 장군이 이런 생각을 했다면 <난중일기>는 탄생하지 않았겠지요." (p.130)


"지인 얘기는 당사자가 볼까 두렵고 개인적인 얘기를 쓰려니 특별한 일이 없고, 참 난감하지요? 이럴 때 쓸 수 있는 게 사회적 이슈입니다. 평소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요? 그것 참 잘된 일입니다. 원래 사람은 글을 쓰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거든요." (p.194)



<밥보다 일기> 중에서 특히 와 닿았던 문장들이다. 이것 외에도 많은데 어쨌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그동안 글을 쓰면서 느꼈던 어려움들은 결국 '일기'에 대한 거부감, 편견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그동안 '육아' 이외에, 일상 속에서 글의 소재를 찾으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상을 글로 옮기는 일은 초등학교 때나 하던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서민 교수는 이 책을 통해 평범한 일상도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해 보여주었다. 내가 그만큼 재밌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계속 해볼 생각이다.


책이나 영화 리뷰, 사회적 이슈에 대한 글을 '일기'로 접근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이 책을 보기 전까진 아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 글은 누가봐도 그럴싸하고 대단한 통찰력이 느낄 수 있으며, 많은 정보까지 담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내 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어떨지 신경이 쓰였다. 잘 써질 리가 없었다.


이제 이런 생각들에서 벗어나 뭐든지 "일기로 써야겠다"고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럼 훨씬 편하게, 지금보다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것에 대해서든 그냥 내가 느끼는 대로 부담없이, 재미있게 쓰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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