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도 추석에도 ‘민족 최대의 명절’이란 수식어를 붙여 쓰니 설과 추석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유년기의 부질없는 논쟁거리가 되곤 했다. 난 설이 더 큰 명절이라고 우겼지만 딱히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열 중 예닐곱은 추석이 더 큰 명절이라고 했다. 설이 더 큰 명절이라는 주장은 이를테면 ‘소수설’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년기의 설에 대한 나의 감성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추석이 설보다 큰 명절이라는 주장이 ‘다수설’이었던 이유는 있었다. 1960년대 절대빈곤의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에게 추석은 설보다 확실히 풍요한 명절이었기 때문이다. 식량이 궁핍해지는, 이른바 절량기의 설 명절은 한겨울인 데다 보리는 겨우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으니, 떡은커녕 메를 지어 올릴 쌀조차 궁했다. 그에 비해 추석은 쌀농사인 가을 추수가 끝난 직후에 맞는 명절이었으니 물적 풍요함과 심리적 안정감이 충만한 추석이 갖는 최대 명절로서의 위상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설은 빈곤했던 시절의 명절이었음에도 추석과는 다른 특별한 감성이 있었다. 옛날부터 음력을 사용했던 우리 민족에게 설은 한 해의 첫날이었다. 이날을 기해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고, 이날을 기해서 육십갑자의 새해가 시작되고, 이날을 기해서 농사의 계획이 수립되었다.
설은 한 달여 전부터 시작되었다. 태양의 절기인 동지는 양력 12월 22일을 전후한 날로 못 박혀 있음에도 조상들은 굳이 음력으로 환산한 동짓날을 환기했다. 그 동짓날은 ‘작은’ 설날이라고도 했다. 또한 설날이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는 날이라면 15일 후인 정월대보름은 오로지 먹고 즐기는 날로 따로 쇠었으니 이 또한 설날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빈곤한 농경 시절에도 무려 두 달여를 사실상 설명절로 쇠었다. 내가 소수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설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명절로 그 위상을 지켜왔지만, 그런 까닭으로 수난도 겪었다. 일제(日帝)는 강점기 중에 이중과세(二重過歲) 금지라는 명목으로 양력설을 쇠게 하고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은 쇠지 못하게 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하였고 그 정책은 어이없게도 해방 후 상당한 기간까지 지속되었다. 이때 양력설을 ‘신정’이라 하고 상대적으로 우리의 설은 ‘구정’이라 명칭 하였다. 그로 인하여 일부에서는 신정에 차례를 지내는 가정도 생겨나고 설은 존폐의 기로에 내몰리기도 했다. 이중과세 금지의 정책은 군사 정권 시기에 국가의 시책으로 장려되어 오다가 1985년 ‘민속의 날’이란 명칭으로 공휴일로 지정되고, 1989년에 이르러 고유의 명칭인 ‘설’을 되찾았다. 지금도 일각에선 우리의 명절인 설을 구정이라 일컫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이는 꼭 시정해야 할 오류이다. 엄연히 설은 구정이 아니라 설이다.
‘설빔’은 설에서 파생한 말이다. 전쟁 이후 심각한 물자난에 허덕이면서도 설이 되면 모두 설빔을 했다. 설빔은 설 명절을 맞아 새로 장만한 옷과 신발 등을 이르는 말로써 남도 지방에선 ‘설치레’라고도 했다. 읍내 오일장에서 산 신발과 양말, 내의, 겉옷 등은 선반이나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오다 설날 아침에야 입고 신었다. 설빔은 아직도 설이 며칠 남은 날에 잠시 꺼내 신어도 보고 입어도 보며 다시 선반 위로, 장롱 속으로 고이 모셔졌다. 설이 오기까지 우리는 구멍 난 양말과 해진 옷을 기워 입으며 설빔으로 산뜻하게 치장하게 될 설날이 밝아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설날을 하루 앞둔 날은 온 마을이 잔치 분위기에 흠뻑 젖었다. 멀리 객지로 떠난 사람들은 손에 손에 선물을 들고 고향의 부모 형제들을 찾았고, 가난한 농가엔 갑자기 도회지에서 묻어온 생기가 넘쳐났다. 낮은 토담이 이어진 고샅에는 고향을 찾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했고, 집집마다 ‘치지직’ 하는 전 부치는 소리와 솥뚜껑 여닫는 ‘가가강’하는 소리, 온갖 구수한 음식 냄새로 마을을 뒤덮었고, 굴뚝에서 나온 파란 연기는 낮은 초가지붕 위로 피어올라 구름처럼 마을을 에워쌌다.
설날이 내게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돌아가신 내 어머니와 나만이 가졌던 특별한 행사 때문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섣달그믐날 밤에 나는 어머니를 따라 마을에서 두어 마장 떨어진 당골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풀 먹인 무명옷에 추위를 막아주는 겹저고리를 정갈히 입었고,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머리는 쪽을 지어 푸른 옥비녀를 꽂았다. 나는 설빔을 차려입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고샅을 벗어나자, 들판에 몰아치는 찬 바람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당골네는 노파였다. 그녀의 신방(神房)에는 제석신(帝釋神)과 창칼을 든 여러 신장(神將)의 그림이 바람벽에 드리웠고, 방안에는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지화(紙花)가 장식되어 있었다. 키 큰 놋 촛대 위에 간신히 선 촛불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고, 어머니는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무언가를 간구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당골네의 지시에 따라 어머니와 내가 제단을 향해 몇 번인지 모를 절을 올린 후에야 긴 기도가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 어두웠다. 차가운 밤하늘엔 별이 유난히도 총총 빛났고, 서낭당을 돌아 나오는 길에선 살을 에는 바람이 늙은 소나무 가지를 울리며 휘몰아쳤다. 어머니의 풀 먹인 무명 치맛자락은 규칙적으로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나는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어머니는 무슨 소원을 간구하셨던 것일까?... 마을의 고샅을 들어서자, 아직도 집집에선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 희미한 격자문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섣달그믐날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속설이 있었지만 나는 이내 잠에 들었고 다음 날 내 나이는 또 한 살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