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by 모노크롬

50년대에 태어난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정월은 아주 특별한 달이다. 정월 초하룻날인 설이 민족 최대의 명절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불과 열 닷새 만에 맞는 정월 대보름 또한 그에 못지않은 명절의 위상과 따뜻한 향수가 우리 세대의 정서 속에 짙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매월 음력 15일을 보름날이라 하지만 정월 보름날은 보름 중의 으뜸으로 쳐, ‘대보름’이라 한 것만 봐도 민중이 이날을 얼마나 귀히 대접하는지 알 만하다.


설날의 하루는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조상들께 차례를 올리는 일로 종일 분주하지만 정월 대보름은 아무리 부지런한 사람도 일손을 놓고 하루 종일 먹고 놀기만 하는 날이어서 그 여유로움으로 남녀노소가 편안하고 즐겁기만 한 날이었다. 고단한 농경생활은 그래서 정월만큼 행복한 달이 없었다.


정월 대보름으로 대표되는 세시풍속으로는 부름 깨기와 귀밝이술 마시기, 그리고 윷놀이와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지신밟기 등이 있으니 온 동네가 하루 종일 취흥에 흠뻑 젖었다. 머리에 쇠똥도 벗지 못한 어린놈이나, 추호라도 행실이 엇나가 남의 입에 오르내릴까 항상 근신했던 젊은 여인들도 귀밝이술 한 잔에 볼이 붉어지지만 이 날 만큼은 욕될 일이 아니었다. 농악대는 하루 종일 가가호호를 돌며 꽹과리와 징을 치며 지신을 밟았고, 윷놀이에 여념 없는 장정들은 여기저기서 환호소리를 울렸다. 일 년 내내 주렸던 창자가 늘어나도록 이 날은 모두가 마시고 먹고 놀았다.


내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는 정월 대보름날은 모두가 곤히 잠든 첫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아직 마을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고 간혹 격자창호에 희미하게 비치는 호롱불 빛만이 띄엄 띄엄한 첫새벽, 차가운 겨울바람은 귓불을 에는데 동구 밖 봇도랑에선 풀 먹인 무명옷을 정갈히 입은 어머니께서 반듯한 돌 위에 정화수를 올리고 두 손을 비비며 기도를 하고 계셨다. 정화수 옆에 놓인, 짚으로 엮어 만든 꾸러미엔 하얀 멧밥과 밤 대추 계란 생선 등이 들어 있었다.


서쪽 하늘엔 샛별이 유난히 빛나고 봇도랑에서 낮은 소리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오히려 오싹한 추위를 느끼게 했지만 어머니의 기도는 길고 간절했다. 동녘 완만한 산능선이 희끄무레한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낼 무렵 어머니의 기도는 끝이 났고 나는 어머니의 발걸음을 쫓아 언 볼을 비벼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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