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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혜영 Jan 12. 2022

어쩌다 사장

“하고 싶은 거 없으면 출판사에 취직해서 돈이나 많이 벌어. 우리 언니 친구가 출판사 다니는데 돈 엄청 잘 버나 봐. 맛있는 거 진짜 잘 사줘.”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이었던 나는 친구의 조언에 힘입어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좋아하는 책을 만들면서 돈도 많이 번다는데 내게는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빈곤한 내 월급 봉투와 허구한 날 계속되는 야근 생활에 ‘이게 아닌데?’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개미가 되어 하루하루 보내던 어느 날 첫 직장에서 만났던 대학선배가 연락을 해왔다.     


“우리 맥 편집을 배워 보자!”

“선배, 나는 이 바닥을 뜰 거야.” 

    

정말 금방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지 했었다. 그러나 의지와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나는 같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선배는 맥 디자인을 배워 편집자에서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몇 년 후 선배가 다시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혜영 씨, 우리 웹디자인 배워 보자.”

“선배, 나는 이 바닥을 뜰 거야. 이젠 정말 못 해먹겠어!”     

 

나는 같은 대답을 선배에게 하며 이번에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인쇄밥을 그만 먹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이후 선배는 실제 웹디자이너가 되었다. 


그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책 만드느라 선배를 만나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 닿은 선배는 내게 꽤 의외의 말을 전했다.


"나, 지금 미용일을 배우고 있어!"


그때 나는 뭐라고 말을 했던가. 나 역시 이 바닥을 청산하고 새로운 일을 찾아나서겠다고 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계속 자신의 길을 찾아 자기계발에 여념이 없던 선배와 달리 나는 출판사만 바뀌었을 뿐 같은 일을 여전히 하고 있다. 

심지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쩌다 사장이 되어 헤매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중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일을 이제는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말이다.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다른 일인가를 절감했던 것만큼이나 직원으로 일을 할 때와 사장이 되어 책을 만드는 일은 또 다른 일임을 깨닫고 있다.     

숫자에 무척 약하던 내가 치열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당연시하던 일들이 내 욕심일 수도 있음을 절감하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산투르를 연주할 때면 누가 불러도 듣지를 못할 만큼 ‘정열’에 빠진다고 본인의 입으로 고백했다. 나에게 책을 만드는 일은 조르바의 정열에 어느 만큼 다가서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어렴풋이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어서도 왠지 책과 가까이 있을 것만 같다. 그때도 “난 이 바닥을 뜰 거야!”를 비록 외치고 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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