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반 전에 큰 개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았다. 무려 여덟 남매. 개중 한 마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어미는 짐짓 무심해 보였지만 새끼들은 어미를 무척 따랐다. 어미의 등허리에 올라가 낮잠을 자기도 하고 어미의 다리를 베고 있기도 했다. 어미가 조금만 움직여도 졸졸졸 따라와서는 젖을 물었다.
어미는 형편없이 말라갔다. 갈비뼈가 몇 개인지, 척추가 어떻게 생겼는지 난시인 내가 나안으로도 관찰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미는 단 한번을 새끼를 물리친 적이 없었다. 열흘이 흘러 새끼들이 제법 컸다는 소리를 듣고 강아지들을 보러갔다. 고구마를 심는다는 핑계로 강아지를 보러간 것이다.
큰 개의 새끼라 그런지 고작 한 달 반인데도 꽤나 커져있었다. 전에는 쑥쑥 발이 빠지던 하수구를 영리하게도 펄쩍 뛰어넘기도 하고 집을 벗어나 텃밭에 몰래 들어가서 온통 흙을 묻혀오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기세좋게 어미에게 치대고 있었다. 여전히 어미는 형편없이 말랐지만 새끼 일곱마리를 물리치는 일이 없었다.
오늘은 그 일곱마리들이 다른 곳으로 분양가는 날이라고 한다. 어제 새끼들의 동영상을 보다가 ‘이 놈들이 낼모레면 어미를 떠난다는 것을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제 어미가 좋아서 폴짝폴짝 날뛰고 있는데 이틀 후면 다시는 어미를 볼 수 없는 곳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까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났다. 영문도 모르고 어미가 없는 세상으로 영원히 간다. 그 사실이 딱했다.
그런데 오늘 어버이 날이라 가만 생각해보니 이 새끼들이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나도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한다. 기회만 있으면 기대고 싶고 응석도 부린다. 하지만 서른이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여전히 부모가 계시지 않는 세상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다른 그림은 다 그리는데 부모님이 영영 안계신 하루는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도 언젠가는 부모가 계시지 않는 세상으로 영원히 떠난다. 그게 언젠지 나는 모른다. 저 새끼 강아지 일곱 마리처럼.
아 어째서 부재를 상상해야만 소중함을 생각하는 것인지. 참으로 못된 심보가 아닌가 생각한다. 억지로 슬픈 상황을 그려내어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 거 참 심보 못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