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지? S가 너무 슬퍼해.”
며칠 전, 아빠를 여읜 절친 S가 아빠를 잃은 슬픔과 그리움을 아이에게 하소연하면서
아이에게 같이 있어 주면 안 되냐고 물어본다고 한다.
아이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또 외박을 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뭐하고 있어. 얼른, S를 위로하고 곁에 있어 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죽고 없는 밤.
슬픔에 잠긴 아이 곁에 아무도 없을 것을 상상하니 결국, 아이를 보내야 될 것 같았다.
“가서 위로해주고 와”
“역시 엄마가 먼저 그렇게 이야기해줄 줄 알았어.”
자신의 외박에 마음 불편해할 나의 눈치를 보고 있던 아이가
내가 먼저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 엄마. 이제 나를 믿고 나의 외박을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엄마를 믿어주듯이.”
나까지도 위로하면서 친구에게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생을 아빠 없이 산 아이가 아빠를 잃은 아빠 바라기였던 친구를 어떤 마음으로 위로를 할까?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빠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만약 아이가 아빠에 관해 물어오면, 뭐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고민하면 뒤척였던 밤들이 무색할 정도로.
‘엄마와 아빠는 서로 맞지 않아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단다.’
라고 정직하게 이야기한다면, 내가 너무 무책임해 보였다.
‘나를 위해서 좀 참아주지는 못했어? 맞추려고 얼마만큼 노력했어?
엄마가 미혼모가 될 만큼, 나를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 만큼 엉망이었어?
그럼 나는 왜 낳았어?’
라며 나를 원망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최선의 대답은 ‘죽었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죽었다’고 할까? 가 고민이었다.
아이가 되도록 좀 더 근사하게 아빠를 상상했으면 싶었다.
사람들을 구하다가 사고를 당해 뇌사 상태에 빠져 장기기증을 했다고 할까?
아니면 '엄마는 사실 시한부 인생의 남자를 사랑했었단다.' 할까? 별별 시나리오를 썼는데,
막상 아이가 물어보지를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애가 묻지도 않은데 굳이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싶어서 넘어갔는데,
가끔은 남들 다 있는 아빠들을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 궁금했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 아이 역시 대답할 용기가 없을 거라고 스스로 판단해버렸다.
어느새 아빠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아이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그때 즈음 물어보기 적당할 것 같았다.
아이에게 정직하게 이야기할 용기를 낼 만큼 나도 어느 정도 단단해진 시점이었다.
“왜 아빠에 대해 안 물어봐?”
“어? 갑자기?”
아이는 지금에서야? 굳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너무 뜬금없다는 아이의 표정에 괜한 것을 물었나? 심장이 쿵 내려앉은 나는
아냐, 그냥, 궁금해서. 뒷끝을 흐리다가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안 궁금해? “
”어차피 없는 건데, 뭐가 궁금해. 궁금하다고 뭐가 달라지나?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만날 수 있는 거야?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분명한 사람을 굳이 궁금할 이유가 있나?"
할 말을 잃었다. 쿨한 건지 차가운 것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방어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아이는 자신에게 나름의 처방을 내리고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은 체념하고,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해하는 거.
오히려 아이가 나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웠다.
그런데 그날 이후부터 아이는 자연스럽게 친구들의 아빠들 이야기를 했다.
누구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 노름을 했다. 술을 먹고 와서 난리를 폈다는 둥,
봉인이 해제되어 버린 금기는 아이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
“없느니만 못한 아빠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나는 오히려 다행이지 뭐야”
체념인지, 만족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이는 아빠 없는 아이에 대한 편견에 묶여있지는 않았다.
아이를 아빠 없는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는, 사회도, 관습도, 그 누구도 아닌, 나였는지도.
오히려 나는 아이의 그 무심함에 위안과 격려를 받았다.
“나는 원래 없어서 아빠의 부재를 못 느끼는 거지. 원래 있던 애들은 느끼는거구.
결핍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라구.”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결핍’이라고 말을 했다.
나에게는 시한폭탄 같은 단어가 아이에게는 공기와 같았다.
“엄마. 나 살면서 아빠가 필요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있어 본 적이 있어야 필요를 느끼지.
대신 아빠 같은 엄마가 있었잖아. 엄마가 이인분인데 뭐. 난 괜찮아."
처음부터 있어 본 적이 없었던 결핍이 위로를 건넨다.
진짜 괜찮은 거야? 이때까지 진짜 괜찮았어?
나는 여전히 아이의 마음을 알고 싶지만, 궁금증을 접어 두기로 한다.
평생 없었던 결핍에 대해 잘 처방하면서 살고 있는 아이에 대한 걱정은 접고,
아이의 바램도록 운동부터 하고 다이어트를 결심해보는 게 어때?
영양과다한 나의 몸이 지금 결핍을 요구하고 있다.
건강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주는 거.
그게 2인분 엄마가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수도.